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권대웅, ‘햇빛이 말을 걸다’
‘봄이야’라고 말을 거는 햇빛과 거기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돋아나는 잎과 꽃잎. 그 눈부심 앞에서 우리는 매번 새롭게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마치 봄날의 햇빛 아래 처음 서 있는 나무처럼,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을 향해 다시금 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지난겨울의 상처와 눅눅한 마음을 햇빛에 내어 말리는 봄날, 권대웅의 시집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문학동네)를 읽었다.
첫시집 ‘당나귀의 꿈’을 낸 지 10년 만에 묶여 나온 이 맑은 슬픔의 다발은 그에게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가 상당히 길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유난히 봄에 관한 시가 많은 것도 ‘털어도 털어내 버려도/떠나지 않는 그리움’이 수시로 도져오는 탓이다. ‘흰 구름의 날들’에서 시인은 ‘이 봄을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가/아, 하면 아, 하는/오, 하면 오, 하는 하늘 가득/새 발자국처럼 떨어지는 햇빛’을 따라 ‘지금은 아이 낳고 잘 사는/옛날 애인 봄단장 하는 집에/때 묻은 손으로 자장면 배달이나 가고 싶다’고 말한다. 이처럼 햇빛과 구름이 잘 배어든 그 쓸쓸함에서는 ‘깻잎 냄새 같은 저 풍경들 적막한 소리들’(‘꽃 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이 들린다.
당나귀처럼 긴 마음의 귀를 가진 그에게는 햇빛조차 소리로 들린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땅 속에서 솟아 오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새싹이나 나뭇잎의 끝이 뾰족한 것은 그것이 무언가에 귀 기울인 흔적일 수도 있겠다.
이처럼 우리를 향해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 어디 햇빛뿐이랴. 저 바람소리, 저 빗소리, 저 물소리 또한 구두점 없이 넘쳐흐르는 말이 아닌가. “눈으로 듣는 것을 배울 때만 자연은 인간에게 말한다”는 볼노프의 말처럼, 권대웅의 시는 눈으로, 또는 몸으로 만물의 소리를 듣는 법을 넌지시 들려준다.
나희덕 시인·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