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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사무라이의 회계부'…19세기 사무라이의 삶

입력 | 2003-04-18 17:35:00


◇사무라이의 회계부(武士の會計簿)/이소다 미치후미(磯田道史) 지음/신초(新潮)신서 2003년

‘사무라이’하면 사람들은 어떤 것을 머릿속에 떠올릴까. 아마도 대부분은 무시무시한 일본도를 허리춤에 차고, 마구 사람을 베어 대는 잔인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사무라이는 군사집단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에도(江戶)시대 중반(18세기) 이후 군사집단의 성격은 없어졌다. 행정기구가 안정되고 복잡해짐에 따라 칼보다는 소로방(주판)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사무라이는 전사로서가 아니라 유능한 관료이기를 요구받았다. 그렇다면 당시의 사무라이들은 도대체 어떤 생활을 했을까. 이것이 이 책의 테마다.

이 책의 자료는 가나자와항(金澤藩)의 경리회계를 담당한 이노야마(猪山) 집안이 1842∼1879년 약 37년 동안 기록한 가계부다. 항의 회계를 담당했기 때문인지 기록은 매우 상세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어떤 물건을 샀고 어떤 것에 돈이 필요했는지가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저자는 “떡 하나를 샀더라도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같이 상세한 가계부가 남아 있는 것은 단지 이노야마 집안이 항의 회계담당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에도시대 말기의 사무라이는 항에서 받은 급료만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다. 특히 지출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교제비, 사례금 등 사무라이의 신분과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다. 많을 때는 연간 지출의 3분의 1이 이런 용도로 쓰였다. 이노야마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빚은 갈수록 불어나 마침내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이노야마 집안은 어느 날 일대 결심을 하고 빚더미와 결별하기 위해 가산을 팔아 빚을 정리하는 한편 수입과 지출을 엄격하게 관리하기 위해 이 같은 가계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가계부에는 누구에게 얼마를 빌렸고 어떤 연중행사를 치렀는지, 출산 교육 결혼 장례식 등에는 무엇이 필요하고 돈은 얼마나 들었는지 기록돼 있다. 이 가계부를 보면 당시의 하급 사무라이의 일상생활이 어떠했는지는 물론 당시의 사회관계까지도 영화를 보듯이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가나자와항에 근무했던 이노야마 나오유키(猪山直之)의 한 달 용돈은 현재의 화폐가치로 약 6000엔이었다. 지금의 서글픈 봉급생활자 신세와 다를 바 없다.이노야마 집안은 메이지(明治) 유신의 격동기에도 살아남았는데, 뛰어난 회계처리 능력을 평가받아 유신 뒤에 해군의 경리담당으로 발탁됐다.

저자는 “산술로부터 신분제도가 무너진다”고 평했다. 신분제와 결별한 근대국가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인 관료제와 군대에는 수학적 합리성이 반드시 필요했다. 예컨대 대포의 탄도며 행군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계산하지 않으면 군대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노야마 집안은 아무런 정치적인 야심도 없이 에도바쿠후(幕府)에 대해서도, 메이지정부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충실하고 유능한 관리로서 헌신했다. ‘관료제의 본질은 목적의 합리성보다 수단의 합리성을 훨씬 더 중시한다’고 막스 베버는 말한 적이 있다. 일본은 관료의 힘이 매우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이 근대 일본 관료제의 특질을 뒤편에서 비춰 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연숙 히토쓰바시대교수·언어학 ys.lee@srv.cc.hit-u.ac.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