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한국의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를 길러내는 이공계 대학이다. 그런데 필자의 전공은 자연과학이나 공학이 아니라 사회학이다. 사회학 중에서도 과학기술이나 과학기술자와 관련된 사회적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어서 직장에서 보고 듣는 것 모두 흥미로운 연구의 소재가 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동료 교수나 학생들의 대화에 자주 오르내리는 화제는 좋은 연구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이다. 특히 정해진 시간 안에 가시적 목표가 설정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경우 연구자들의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것을 목격한다. 사시사철 밤낮없이 실험실을 지키며 연구 성과에 매달리는 동료와 제자들을 보면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러시아 이민 출신의 미국 물리학 박사로 300여권의 책을 남긴 과학저술가)가 소개한 프랑스의 천문학자 귈롱 르장티의 일화가 떠오른다.
18세기 말 서양에서는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과학적 이슈였다. 당시 과학자들은 지구상의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곳에서 금성이 태양의 가장자리를 지나는 정확한 시간을 재면 태양까지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고 믿었다. 1761년 금성이 태양을 지나게 돼 있었고, 의욕적인 젊은 과학자 르장티는 유럽과 멀리 떨어진 인도의 프랑스령 퐁디셰리에서 이 장면을 관측하고자 험난한 항해에 나섰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중이었는데, 르장티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 마침 영국이 그곳을 점령하고 프랑스 선박의 입항을 허용하지 않는 바람에 그의 계획은 허사가 되었다.
다음번 금성이 태양을 지나가는 시기는 8년 뒤였다. 그 다음에는 100년 이상을 기다려야만 기회가 올 수 있었다. 르장티는 일단 프랑스로 돌아가고 나면 그곳에 다시 오기가 어려우리란 생각에 인도에 8년간 머물렀다. 1769년 6월 3일 퐁디셰리는 맑은 날씨였다. 그러나 금성이 태양을 지나는 바로 그 순간, 관측기기를 설치한 바로 그 지점에 검은 구름이 몰려와 태양을 가로막는 바람에 르장티의 8년간의 기다림과 평생의 꿈은 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실의에 차 프랑스로 돌아온 르장티에게는 암울한 소식들만 기다리고 있었다. 인도에서 보낸 편지들은 도중에 분실됐고 가족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 재산을 처분하고 떠난 뒤였다. 재산을 되찾기 위한 소송비용조차 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르장티는 인도 체류 8년 동안 허송세월 하지 않고 성실하게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원래 계획했던 관측 준비를 하는 틈틈이 날씨와 조류를 관찰하고 고대 인도의 천문학을 공부하며 주변 지역도 널리 여행했다. 이런 지식과 견문을 바탕으로 르장티는 인도에 관한 책을 저술해 성공을 거뒀고 다시 단란한 가정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르장티는 설사 그가 처음 의도했던 대로 인도에서 관측에 성공했다 할지라도 역사에 남는 과학자로서의 명예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과학자들 사이에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 그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기 때문이다.
분명 르장티는 성공과 행운이 따른 과학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과학자로서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은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 당초 자신의 뜻대로는 아니었지만 인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과학자로서 사회에 공헌했고 역사에도 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형형색색의 꽃과 신록의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오는 이 봄날, 연구와 학업에 몰두하고 있으면서도 그 노고에 미치지 못하는 보상에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과학기술자와 이공학도들에게 르장티의 아이러니한 인생이 조그마한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21일 제36회 ‘과학의 날’을 경축하는 휘장이 나부끼는 거리를 지나면서, 국민 모두가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과학기술의 성과가 수없이 많은 르장티들의 고난과 불운을 거름으로 맺어진 열매임을 알아주기를 소망해본다.
윤정로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