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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 경주일대 6·25 격전지서 유해 400여구 발굴

입력 | 2003-04-18 18:20:00

경주시 안강읍 금곡산 정상에서 육군 50사단 금병학 대위와 병사들이 M-1 실탄과 탄피 등 전사자들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다. 경주=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17일 오후 경북 경주시 안강읍 검단리 금곡산 정상. 높이 400여m지만 산세가 험악해 1시간가량 비지땀을 흘려야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조심스레 지뢰탐지기로 조사하던 육군 50사단 경주대대 배창식(裵昶植·22) 일병의 귀에 ‘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따르던 병사들이 조심스레 흙을 파헤쳤다. 30㎝ 정도 땅속에서 53년 전 벌어진 6·25전쟁의 모습이 드러났다.

뼛조각과 함께 터지지 않은 수류탄 2발이 발견됐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M1소총 탄환과 탄피가 여럿 발견됐다.

“수류탄도 던져보지 못하고….”

병사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 최후까지 진지를 지키던 국군의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지뢰탐지기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금속 인식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훈련 도중 전투 현장에 투입된 병사이거나 학도의용군일 가능성이 큰 것. 한 병사는 “마치 무명용사의 무덤을 파는 느낌”이라고 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전략지대인 경주 안강읍과 포항시 기계면은 1950년 8월 초순부터 9월 초순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부산으로 진격하던 북한군 정예부대 12사단은 안강·기계지구에서 국군 수도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치자 총공세를 벌였다.

그 중 금곡산에 대해 북한군은 밤낮없이 사방에서 포위공격을 가했다. 이곳이 경주 공략의 유리한 고지였기 때문. 고립된 국군은 북쪽뿐 아니라 남쪽에도 70여개의 참호를 파고 저항해 고지를 지켰다.

금곡산 전투는 전사(戰史)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이 있을 뿐이다.

땅 밖으로 유해와 유품을 한 점씩 꺼내면서 신세대 장병들은 6·25전쟁을 ‘지나간 역사’가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받아들였다.

이향림(李香林·21) 일병은 “처음엔 설마 했다. 그러나 유해가 너무 많아 내가 마치 전투를 벌인 듯 처절함이 느껴졌다. 아직도 탄피에 열기가 남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포항지구 전투에서 큰아버지를 잃은 중대장 금병학(琴炳學·30) 대위는 “지정학적으로 금곡산은 안강과 기계를 잇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거점”이라며 “낙동강 방어선이 일부 무너진 상황에서 금곡산을 지켜냄으로써 북한군의 경주 진입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열악한 무기로 나라를 지킨 선배들의 정신에 고개가 숙어진다”고 말했다.

육군 50사단(사단장 방효복·方孝福) 경주대대는 이달 7일부터 축구장 크기의 금곡산 정상 일대를 수색해 이날까지 뼛조각 50여점과 유품 230여점을 발굴했다. 그러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유해는 2구뿐이었다.

육군본부 유해발굴 요원인 엄상열(嚴相熱·22) 상병은 “유해의 모습을 보면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며 “6·25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고 말했다.

한편 육군 50사단은 2000년부터 다부동, 안강 등 격전지 유해 발굴에 나서 완전유해 132구, 부분유해 346구, 유품 1만3000여점을 발굴했다. 발굴 작업은 이달 25일 끝난다.

경주=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