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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박종규/갈피 못 잡는 한나라당

입력 | 2003-04-20 18:12:00


한나라당이 대통령선거에 패배한 지도 4개월이 지났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회창 후보 중심의 당이었으나 지금은 새 지도자의 선출을 놓고 당권 경쟁이 시작됐다. 23만 당원의 직접투표에 의한 대표 선출, 국민참여 방식을 가미한 상향식 의원후보 선출 추진 등 나름대로 당내 민주화의 길로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다. 깨끗한 경선이 이뤄진다면 누가 대표가 되든 표면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다.

▼보수정당으로서의 정체성 모호 ▼

대선에 패배한 야당이 안쓰러워 비판을 삼가고 있었으나 작금의 언론보도를 접하면 도저히 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나라당이 믿음직한 야당으로 재기하기 어렵게 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지난해 대선 때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자. 이 후보가 고전한다는 소문을 들은 어느 열렬 지지자 부인이 걱정 끝에 한나라당 지역구 사무실에 전화로 선거운동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사무국 직원의 “그런 사람 안 뽑습니다”라는 대답에 기가 막힌 그 부인은 남편한테 “한나라당이 진다면 지는 이유를 알겠다”고 했고, 부인의 말대로 어김없이 한나라당은 패배했다. 이쯤 되면 정당이라기보다 ‘고장 난 기관차’다. 이 후보가 진 것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진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대승한 한나라당은 오만했고, 동맥경화에 걸린 당 체질은 역동성과 생동감이 없었다. 지역구에 내려보낸 대선 자금을 제대로 썼는지 의심된다는 말도 돌았다. 한나라당은 이 후보가 좋아서가 아니라 나라를 걱정한 1144만명의 지지자를 무성의로 배반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뼈를 깎는 반성의 빛은 보이지 않고 혼탁의 당권 경쟁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당 개혁 방안이 진일보했다고 해서 당장 희망의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아니다. 구성원의 체질이 문제인 것이다. DJ정권 초기에 처음 경험한 여당 체질의 야당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3홍(弘) 비리’와 같은 정권의 약점이 노출되면서 앞 다투어 투사인 양 나섰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체질로는 건전한 야당이 될 수 없다. 또한 최근 점증하는 내각제 선호 경향은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심보만 드러낼 뿐이다.

한나라당의 문제점은 무엇보다 보수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최근 국회의 당 대표 연설에서 느닷없이 제기한 남북 국회의원 회담은 이라크 파병안 눈치 보기 처리와 함께 대중적 인기 영합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다른 형태의 남북회담 제의는 DJ정부의 흉내 내기로 보일 뿐이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의 박수도 받기 틀렸다. 어설픈 사팔뜨기 정책은 당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할 뿐인 것이다. 보수면 보수답게 정정당당해야 안보를 우려하는 국민의 확실한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기득권 옹호 집단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10여년이 지났는데도 민정당 색채가 가시지 않고 있다. 과거 기득권 세력의 온존과 재벌 위주의 이미지를 불식시킬 수 없는 태생적 결함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면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기 어렵다. 새로운 젊은 보수의 창출과 재벌이 아닌 기업 위주의 정책으로 이미지 변화를 시도할 때는 지금이다.

셋째, 영남 지역정당 탈피가 시급하다. 벌써부터 영남 의원들은 내년 총선에서 당선을 떼어 놓은 당상처럼 보고 있고 호남 낙선을 당연시한다. 이번 당 개혁안도 자신의 당선에 유리한 제도만 관심사일 뿐 전국정당 만들기의 큰 그림은 뒷전이다. 새 일꾼에게 길을 터 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원로가 아쉽다.

▼이미지 변화-지역당 탈피 시급 ▼

유권자는 변화를 원한다. 누가 당권을 쥐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혼탁한 싸움은 공멸의 첫 걸음이다. 이제 한나라당은 5, 6공 잔당이나 재벌 앞잡이 등의 이미지를 과감히 청산하고 자유민주주의가 확보되는 대북 정책, 성장 속의 복지, 법에 의한 노사관계 정립, 진정한 상향식 공천, 돈 안 드는 선거제도 등 깨끗한 보수의 깃발을 두 손 높이 치켜들 때 국민의 진정한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년 총선에선 지난 대선 때보다 더 못한 결과를 맛볼 것이다.

박종규 행정개혁시민연합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