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를 평가하는 기준은 철저히 ‘GE가치’에 따른다. GE가치의 핵심 항목 가운데 하나가 도덕성이다. 도덕적인 사람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장기적으로 회사를 망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단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을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국 코네티컷주 페어필드의 제너럴 일렉트릭(GE) 본사에서 만난 인사(HR) 담당 부사장 수잔 피터스는 거침이 없었다.》
터스 부사장은 “최고경영자(CEO) 선발은 우리가 하는 인재양성 과정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헤드쿼터의 HR 담당자들은 GE의 톱매니저 600명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 누가 다음 CEO가 될 것인지 역시 이를 토대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검증된 CEO=제프리 이멜트 회장은 2001년 잭 웰치 전 회장의 뒤를 이어 CEO에 올랐다. 그러나 웰치 전 회장의 뒤를 이을 후계 선정 작업은 1996년에 이미 시작됐다.
웰치 전 회장과 HR 담당 수석부사장 윌리엄 코너티, 이사회가 중심이 돼 600명의 톱매니저들 가운데 15명을 1차 후보자로 선발했다. 이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고 집중 테스트를 한 결과 1999년 제프리 이멜트, 밥 나델리, 짐 매커니 등 3명으로 후보가 압축됐다.
GE의 최고경영자 제프리 이멜트(가운데)가 뉴욕주 ‘잭 웰치 연수원’에서 임직원들과 토론하고 있다.
이멜트 회장은 플라스틱사업부에서 메디컬시스템스로, 매커니씨는 조명사업부에서 항공 등으로 자리를 옮겨 각자 새롭고 더 큰 사업부를 얼마나 잘 경영하는지 관찰됐다. 2000년 가을에야 이멜트 회장이 차기 CEO로 떠올랐다.
미국에서도 잘 발달된 프로그램으로 내부에서 CEO를 육성, 선발하는 대기업은 GE GM 포드 등 몇 안 된다. 다른 회사에서 높은 성과를 올린 전문경영인을 CEO로 영입하는 일이 많다. 이 때문에 잘 훈련된 GE 출신들은 다른 기업에서 인기가 좋다. 이멜트 회장에게 ‘패배한’ 나델리씨는 홈디포, 매커니씨는 3M의 CEO가 되었다.
▽GE의 소유와 경영=GE의 기원은 1878년 토머스 에디슨이 ‘에디슨일렉트릭라이트’를 설립한 것. 1892년 톰슨-휴스턴 일렉트릭과 합병해 GE가 탄생했다.
“에디슨의 후손들은 회사 지분을 얼마나 갖고 있고 경영에 얼마나 관여하는가”하는 질문에 그렉 캐피코 홍보부장은 답답해 했다.
“에디슨은 창업자이자 발명가일 뿐이다. 에디슨과 그 후손들은 GE의 경영과 아무 관련이 없다. GE는 아주 오래전 증권거래소에 상장됐고 그 이후 창업자는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
회사의 대주주가 누구냐고 묻자 더욱 난감해했다. “아마도 대규모 펀드들일 것”이라는 대답. 함께 웹사이트를 뒤져보니 바클레이 글로벌 뱅크, 피델리티 등이 2.85∼3.7%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들이고 전체 주식이 약 400만명의 주주들에게 분산되어 있다.
피터스 부사장에게 물었다. “미국에서도 이사회가 제 구실을 못한다는 비판이 많지 않나?”
“GE는 예전부터 이사들이 자주 만나고 사외이사들만 만나는 모임도 활성화되어 있다. 이사회 아래 재무위원회, 감사위원회 등이 있고 이들은 사외이사만으로 이뤄져 있다. 엔론은 이사회가 형식적이어서 문제가 된 것이다. 엔론 사태 이후 정부가 이사회를 강화하는 새로운 규정을 많이 만들었고 선도 기업인 GE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헤드쿼터의 역할=4월 3일 청와대 만찬에 참석한 삼성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청와대는 조직, 일, 사람을 분기마다 진단해 조정하기로 했다”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말에 “그걸 기업에서는 구조조정본부가 한다. GE에서는 400명이 그 일만 한다”고 답했다.
구조본이 도마에 오를 때마다 대기업들은 GE 등 미국의 선진 대기업에도 헤드쿼터가 있으며 한국에서는 구조본이 그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GE 헤드쿼터는 한 회사 내 사업부들을 관리하지만, 한국 대기업의 구조본은 상법상에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면서 계열사들을 관리한다. 한국의 독특한 대기업 발달사에 따른 현상이다. 삼성의 구조본 인원은 100여명.
GE 헤드쿼터에는 600명이 근무한다. 법률 세금 정보기술 HR 재무 등의 전문가들이다. 피터스 부사장은 “헤드쿼터는 각 사업부의 경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며 각 사업부가 책임지고 사업을 한다. 사업부별 헤드쿼터가 따로 있으며 본사 헤드쿼터는 각 사업부가 필요로 하는 전문적인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이멜트 회장을 포함한 13개 사업부 사장단, 헤드쿼터의 재무담당(CFO), 지식경영담당(CIO) 등 30명은 정례 회의를 통해 사업을 점검하고 노하우를 공유한다. GE를 움직이는 최고 조직은 사장단회의(CEC)다.
페어필드=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美 기업지배구조 개선 방향 ▼
한국에서 기업지배구조문제가 ‘오너의 독재’ 문제라면, 미국에서는 ‘최고경영자(CEO)의 독재’가 문제다.
윌리엄 도널슨 미국 증권감독위원회(SEC) 의장은 “최근까지도 미국기업의 CEO는 경영자가 아닌 전제군주(monarch) 역할을 해왔다”며 “사태해결의 핵심은 기업지배구조에 있으며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해 이사회가 CEO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엔론의 분식회계 사건에서 보듯 CEO가 인사권으로 이사들을 장악하면서 사내·사외이사 모두 CEO를 견제하지 못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한 것.
이사회의 독립성을 확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국 정부와 의회는 작년 7월 기업개혁법인 사베인스-옥슬리법을 제정하고 이어 8월에는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상장사들의 이사회 강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기준을 마련해 SEC에서 심의 중이다. 새로운 NYSE규정의 주요 내용은 △이사회의 절반 이상을 사외이사로 하고 △이사회 아래 기업지배구조위원회, 보수심사위원회, 감사위원회를 두어야 하며 △세 위원회는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해야 하는 것 등이다. 사내 인력끼리만 이사회를 구성하는 근친교배 현상을 막기 위한 조치다.
사내이사의 선임도 CEO에 의해 장악돼서는 안 된다. 이사에 대한 상호평가, 다면평가, 3자평가 등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이사회 의장과 CEO를 분리하는 방안도 유력하게 거론된다. CEO는 ‘집행하는 사람’으로 주총과 이사회에서 결정된 것을 ‘실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반면 이사회 의장은 주주와 사외이사를 대표하면서 CEO 등 집행임원을 감시·평가하는 방식.
형식논리로는 주주총회가 최고 의사결정기구이지만 현실에서는 주주나 주총이 무력화되기 쉽다. 이를 막기 위해 ‘주요주주 협의회 활성화’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1∼2% 등 일정 지분 이상의 주요 주주들이 주총 이전에 미리 모여 주총 의안을 검토하고 의결권 행사방안을 논의하는 것. 이 제도가 활성화되면 오너나 CEO가 함부로 주주이익을 무시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기관투자가의 경영감시와 주주권 행사가 필요하다. ‘CEO-대주주-이사회’의 삼각축이 균형과 견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 차원에서 접근하면 이사 개개인이 전문지식과 공정성, 그리고 높은 윤리의식과 자긍심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
허승호기자 tigera@donga.com
▼美 오너경영인 기업 ▼
미국은 인종이 다양한 것처럼 기업 형태도 다양하다.
GE처럼 소유가 고도로 분산되고 전문경영인 체제가 확립된 회사가 있는가 하면 창업주와 후손들이 아직도 많은 지분을 갖고 경영에 참여하는 기업도 없지 않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설립한 포드사가 한 예. 포드는 1956년 회사를 공개한 이후 지금까지 모두 7명의 최고경영자(CEO)가 있었는데, 헨리 포드 2세와 현 회장인 윌리엄 클래이 포드 2세가 창업자 가족 출신 CEO다.
미시간주 디어본에 있는 포드 본사에서 만난 피터 셰리 법률고문실장은 “포드에는 보통주인 A주식과 창업자의 가족들만 소유할 수 있는 B주식이 있다. A주식은 60%, B주식은 40%의 의결권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할 때 B주식은 상장이 금지되었지만 나스닥 등록 기업들에는 아직도 가족만 소유할 수 있는 다양한 주식 형태가 허용된다. 셰리 실장은 “오너는 안정성과 지속성 면에서 좋고, 전문경영자는 외부의 신선한 아이디어와 경험을 도입해 상황에 대한 유연성이 뛰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오너든 전문경영인이든 CEO는 이사회에서 선임하며 14명의 이사 가운데 9명이 사외이사다. 엔론 사태 이전에도 포드는 사외이사 비율이 높았다는 것이 셰리 실장의 설명.
윌리엄 포드 2세 회장은 2001년 CEO로 선임돼 미국 증권가와 경제계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전문경영인이었던 전 CEO 잭 내서가 정보기술(IT)붐을 타고 인터넷, 엔터테인먼트, 자동차정비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한 반면 윌리엄 포드 2세 회장은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비주력 회사들을 정리하고 주력산업인 자동차에 집중하면서 기업가치가 올라가고 있다.
버드와이저 맥주로 유명한 부시사도 5대째 창업자 가족이 경영하고 있는데 경영실적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경제주간지 포천이 선정한 ‘미국의 존경받는 기업’에서 1위를 차지한 월마트처럼 경영은 전문경영인이 하지만 이사회 회장은 창업자 가족들이 맡는 기업들도 많다.
디어본(미국)=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특별취재팀 ▼
▽팀장=허승호 경제부 차장
▽팀원=김용기 신연수 이강운 공종식 정미경 박중현 김두영
홍석민 기자 (이상 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