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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직 노동시장 현장체험 르포]"3D 따지는건 사치"

입력 | 2003-04-20 18:52:00


《경기 침체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바로 ‘없는 사람들’이다. 없는 사람들에게 경기 침체는 생존의 문제다. 오전 3시반부터 인력시장을 기웃거려 시간당 3000원짜리 잡일을 얻으면 운이 좋은 경우다. 일감을 얻지 못하고 허탕을 치는 날이면 그날 점심은 굶어야 하고 밤에는 서울역 지하차도에서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최근 경기가 나빠지면서 크게 늘어나고 있는 일용직 구직자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본보 기자의 직접 체험을 통해 탐사 보도한다. 본보 정양환(丁陽煥·30) 이남희(李南姬·24·여) 기자가 이달 7일부터 5일간 일용직 노동자로 변신했다. 지갑에서 신용카드와 지하철 패스 등 돈이 될 만한 것을 빼버리고 먹고 자는 모든 것을 하루 벌어 충당했다. 이들은 상추잎 뜯기, 청소, 전단지 돌리기 등 여러 일을 경험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일감이 없어 절망했을 때’라고 입을 모았다.》

▼정양환기자 체험기▼

11일 서울 종로구 피카디리 극장 뒤편의 한 평 남짓한 쪽방에서 한 일용직 노동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정양환 기자(왼쪽). -박주일기자

▽‘내일이 걱정이다…’

○ 8일 오전 4시 서울 영등포구 청과물시장. 활기찬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거리를 찾는다는 40대 아저씨는 “예전엔 불을 피우고 삼삼오오 일거리를 기다리곤 했지만 요즘은 일이 없어서…”라며 한숨지었다. 1시간 동안 시장 안을 헤맸지만 사람을 쓰겠다는 곳은 없었다. 통사정 끝에 겨우 일감을 얻은 곳은 과일상가. 다른 일용직 노동자 2명과 함께 2t 트럭 5대에서 과일상자를 창고로 열심히 날랐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면서 2시간여 동안 일을 하고 손에 쥔 돈은 7000원. 주인은 일한 것에 비하면 많이 쳐준 것이라고 말했다.

직업소개소에서도 일을 구하긴 쉽지 않았다. 경기가 안 좋아 사람을 쓰겠다는 곳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나마 있는 새벽 건설현장의 일감도 경쟁이 치열하다고 했다.

○ 9일 오전 6시. 서울 동대문구의 중부일일취업센터를 찾았다. 100여명의 사람이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모두 갈 곳이 정해진 상태였다. 40대 남자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일감 구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직원이 전해준 말은 “대마났다(자리가 없어 공친다)”였다.

정양환기자 일용직 체험 결산 맡은 일일한 시간 임금8일청과물 운반2시간반7000원9일의류자재 운반4시간40분3만원10일화장실바닥 청소5시간반2만5000원11일일감 못구함없음없음

오전 7시가 되자 비까지 뿌렸다. 근처 직업소개소에 들어가 사정해 봤다. 몇 시간을 버티고서야 자재운반을 하는 반나절 일감이 돌아왔다. 할 일은 서울 광진구 군자동 의류업체에서 건물 옥상 창고의 부품과 자재를 내려 옆 건물 옥상에 옮겨다 놓는 작업. 무게는 둘째치고 계단 통로가 좁아 이동이 어려웠다. 오후 5시40분 일이 끝났다. 일당은 3만원.

잘 곳을 찾아 서울 종로구 돈의동 종로 쪽방상담소로 갔다. 이 일대는 625개의 쪽방이 있으며 현재 400여명이 묵고 있다. 상담소 관리인은 “경기가 안 좋아 일감을 못 구하고 쪽방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7000원을 내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자 쪽방들이 보였다. 양팔을 뻗지 못하는 크기의 방에는 14인치 구식 TV, 조그만 나무 사물함, 이불과 베개, 거울 하나가 있다. 공동화장실에서 며칠째 감지 못한 머리를 감았다.

○ 10일 오전 4시반. 쪽방 사람들이 모인다는 인근의 D여관 앞에 나갔으나 5시가 돼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서로 아는 듯한 아저씨 4명만이 어디론가 향해 갔다. 같이 가자고 했으나 숫자가 안 맞는다며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사정 끝에 한 아저씨가 “창덕궁 옆 D인력사무소로 오라”고 말했다.

오전 5시반 D인력사무소로 갔다. 일용직 노동자 150여명이 북적댔다. 이 중에는 20대와 30대 초반의 남자도 20여명이 섞여 있었다. 한 20대 남자는 “요즘은 일감을 가려 선택할 처지가 아니어서 일감을 주는 대로 받는다”고 말했다.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접수를 하면 일을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전부다. 오늘 맡은 일은 빌딩 청소. 경기 의정부시에 있는 한 변전소에서 세제로 바닥을 문지른 후 물로 씻어내고 닦는 것을 반복했다. 오후 7시가 돼서야 일이 끝났다. 반나절밖에 못해서 일당은 절반인 2만5000원. 구토가 나 한참을 고생했다.

○ 11일 오전 9시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눈을 떴다. 자명종을 맞춰 놓았지만 너무 피곤해 듣지 못했다. 밖에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쪽방 사람들은 일을 나가지 못하고 방에서 하루를 공쳐야 했다. 당뇨병이 있다는 50대 김씨는 “차라리 비가 와서 하루 쉬면 맘은 편하다”며 담배를 피워댔다. 며칠 동안 번 돈으로 오늘 하루는 버틸 수 있겠지만 내일이 걱정이다.

정양환기자 ray@donga.com

▼이남희기자 체험기▼

11일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계단에서 홍보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이남희 기자(왼쪽). -박주일기자

▽희미해진 ‘근육통의 기억’

○ 7일 오전 4시 경기 성남시 모란시장. 찬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날씨지만 일감을 찾는 중년 여성들로 붐볐다. 기자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일을 찾아 헤매는 20대 여성. 사람들을 붙잡고 매달렸지만 “초보자는 받지 않는다”며 차갑게 외면했다.

다행히 한 아주머니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면 하겠다는 기자를 측은하게 여겼는지 한 농장 주인을 소개시켜 줬다.

오전 5시반에 도착한 곳은 경기 광주시의 한 상추 농장. 주인집에서 밥 한 공기와 쑥국을 얻어먹고 상추잎을 뜯기 시작했다.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펴고 쉴 새 없이 상추잎을 뜯는 중년 여성들의 손놀림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몇몇이 “아가씨, 앉아서 일하면 주인이 싫어해”라며 호통을 쳤다.

이남희기자 일용직 체험 결산 맡은 일일한 시간 임금7일상추뽑기12시간4만원8일창고 청소7시간2만5000원9일전단지배포6시간2만원10일손전등외관검사8시간2만4000원11일전단지 배포 2시간6000원

11명의 인부가 12시간에 걸쳐 뜯은 상추의 양은 4㎏들이 100박스. 상추를 팔아야 금요일에 주급으로 일당을 지불한다고 했다. 일당이 얼마냐는 질문에 “어려운 때이니 돈을 밝히지 말라”는 핀잔이 돌아왔다.

○ 8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의 한 청소용역업체에서 겨우 일할 기회를 얻었다. 오전 8시반부터 오후 6시까지 이 용역회사 안에서 일하는 날은 2만5000원, 외부로 나가 청소 등 용역에 참여한 날은 일당 6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일급으로 돈을 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일단 돈을 받으면 다음날엔 출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면접 후 바로 이 용역업체에서 청소를 시작했다. 대형 진공청소기로 창고 안과 마당을 깨끗이 하는 일이었다. 청소기의 진로를 만들기 위해 먼지 쌓인 공구를 번쩍번쩍 들었다 놓아야 했다. 2시간반 동안의 창고 청소가 끝나자 옷이 온통 먼지로 뒤덮였다.

○ 9일 오전 5시 인력시장이 열린다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을 찾았지만 헛걸음했다. 한 환경미화원은 인력시장이 이미 지난 겨울에 사라졌다고 전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 ‘남부 일일취업센터’를 찾았지만 역시 허탕이었다. 20대 여성은 파출부로도 일하기 힘들다는 게 담당자의 말이었다.

오후 1시. 일거리를 찾아 헤맨 지 5시간 만에 전단지 돌리는 일을 찾았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 근처의 전단지 배포업체에 도착해 1000장의 전단지를 받았다. ‘남은 전단지는 버리지 않는다’ ‘시간 약속은 지키겠다’고 쓰인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4시간에 1000장을 돌리는 것이 기본으로 일당은 2만원이었지만 이곳 역시 1주일 단위로 돈을 준다고 했다.

네온사인 광고전단지 1000장을 서울 지하철 6호선 석계역 일대의 상가 건물에 넣는 일을 맡았다. 다리의 근육통 때문에 남들보다 걸음이 느려 3시간 동안 고작 400장을 돌리는 데 그쳤다. 약국에 들러 파스를 다리에 붙이고 이를 악물었지만 오후 7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90여장의 전단지가 남았다. 일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타면서 아침을 1000원짜리 토스트로 때우고 점심은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10일 오전 8시.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다리의 통증을 느꼈다. 이동이 덜한 일감을 구해야 했다. 구인광고를 살피던 중 손전등 부품의 외관검사를 할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발견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반까지 일하고 시간당 3000원을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손전등 부품제조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하청업체인 경기 시흥시의 한 공장에 가서 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형광등 불빛에 부품을 비춰보는 일을 8시간 동안 하고 처음으로 일당 2만4000원을 손에 쥐었다.(이전 일들은 주급으로 지급됐기 때문에 실제로 돈을 받지 못했다)

○ 11일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이런 날은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었다.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근육통의 아픈 기억’은 이미 가물가물해졌다. 지친 몸을 이끌고 낮 12시 서울 광화문 주변의 한 외국어학원을 찾아가 전단지 400장을 받아 두 시간(시간당 3000원) 동안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부근에서 돌렸다. 주급으로 계약을 해 이번에도 돈은 받지 못했다.

이남희기자 irun@donga.com

▼노동硏 통계 일용근로자 임금▼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6월 전국 6만개 표본사업장을 조사한 결과 일용직을 포함한 비정규직 근로자 5명 중 1명은 노동시간 감소에 따른 임금 감소로 최저임금(월 51만4150원)에도 못 미치는 월 평균 50만원 미만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시간당 임금은 2000∼4000원 미만이 37.9%로 가장 많았고, 6000원 이상은 33.1%, 4000∼6000원 미만은 25.8%, 2000원 미만 3.2% 등의 순이었다. 정부는 이같이 헐값 임금을 받고 있는 일용직 근로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내년부터 고용보험제를 도입하고, 퇴직공제제도의 적용대상을 확대할 예정이다.

고용보험에 가입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고, 퇴직공제제도의 적용 대상이 확대되면 10억원 이상의 공공건설 사업장에서도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노동연구원 허재준(許栽準·42) 박사는 “일용직 근로자를 위한 적절한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현황 파악이 가장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고용보험 시행과 관련해 “근로소득이 드러나는 것을 염려해 일용직 근로자가 고용보험을 기피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런 문제점에 대한 보완대책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조진원(趙震遠·43) 부소장은 “정규직 고용이 원칙이 되고, 일용직 고용은 예외적이어야 한다”며 “정부는 객관적 합리적인 이유 없이 일용직 고용이 남발되지 않도록 제도적인 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강대 남성일(南盛日·49) 교수는 부족한 일자리와 관련해 “기업이 일용직 고용을 포함한 고용 능력을 제고할 수 있도록 세금혜택을 주고 근로자에게는 취업능력을 높일 수 있도록 정부가 직업교육을 강화하는 등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허진석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