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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환수기자의 장외홈런]최희섭과 에릭 캐로스 ‘알고보면 최고 파트너’

입력 | 2003-04-21 17:58:00


잔 속에 물이 반쯤 채워져 있다. 낙관론자는 ‘마실 물이 반이나 남아 있다’고 웃는 반면 비관론자는 ‘반밖에 없다’며 고개를 숙인다.

올해 최희섭과 에릭 캐로스의 묘한 관계가 바로 이 경우다.

시카고 컵스의 더스티 베이커 감독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추앙받는 명감독 중 한 사람. 하지만 이런 그도 1루 터줏대감인 프레드 맥그리프가 떠난 공백은 커 보였던 모양이다. 최희섭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해선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지만 자신의 지도력이 도마 위에 오를 부임 첫 해에 검증도 안된 신인에게 ‘올인’의 도박을 하기는 아무래도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베이커 감독은 최소한 올 시즌까지는 ‘보험용’으로 백전노장 캐로스가 필요했고 오른손 타자엔 최희섭, 왼손타자엔 캐로스라는 ‘플래툰 시스템’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올해 36세의 캐로스가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해도 연봉 800만달러의 고액 선수로 최희섭의 출전기회를 너무 많이 뺏고 있다는 점.

시즌 초부터 신인답지 않은 놀라운 기량을 뽐내고 있는 최희섭은 20일까지만 해도 배리 본즈나 새미 소사 같은 슈퍼스타들을 제치고 내셔널리그 장타력 6위에 이름을 올렸지만 21일 피츠버그전에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해 다시 장외로 밀려났다. 국내 야구팬이 못마땅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곰곰이 되짚어보자. 과연 캐로스는 최희섭에게 손해만 끼치는 선수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기자는 만약 캐로스가 없었다면 베테랑을 선호하는 보수적인 베이커 감독이 최희섭을 팀의 중심인 5번 타순에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최희섭에게도 끝까지 마음을 놓지 않고 훈련에 전념케 하는 좋은 기회가 됐다. 또 캐로스라는 든든한 응원군(?)이 있는 바람에 1루를 혼자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줄일 수 있었다.

이는 김병현이 햇병아리 시절이었던 3년 전 마무리의 중책을 맡을 때와 흡사하다. 당시 애리조나에는 매트 맨타이라는 걸출한 마무리가 있었지만 팔꿈치 부상을 당한 상태였고 봅 브렌리 감독은 큰 부담 없이 김병현을 맨타이의 그림자 뒤에 배치할 수 있었다.

브렌리로선 김병현이 마무리로 성공하지 못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고 김병현은 맨타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풀타임 빅리거의 꿈을 이뤘다.

이후 지난해 말 부상에서 복귀한 맨타이가 마무리 접수를 원했고 김병현은 꿈에도 그리던 선발로 전환할 수 있었다.

피를 말렸던 경쟁자가 사실은 최고의 파트너였음을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는 경우다.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