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수요 프리즘]장훈/새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

입력 | 2003-04-22 18:44:00


봄기운이 익어가던 지난 주말, 서울에서는 매우 대조적인 두 개의 장면이 동시에 펼쳐졌다. 먼저, 서울의 중심부인 시청 앞과 세종로네거리에서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이 별도로 진행하는 4·19 기념행사가 열렸다. 각각 수천명이 운집한 행사에서 보수진영은 ‘반김 반핵’을 통해 4·19 정신을 계승하자고 목청을 높였고, 진보진영은 ‘반전 반미’를 통해 40여년 전 그 날의 숭고한 뜻을 이어가자고 외쳤다.

▼시민사회의 정치적 요구는 폭발 ▼

양측 사이에 별다른 충돌은 없었지만,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참여의 열기와 더불어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던 것도 사실이었다. 같은 시간, 서울의 한편에서는 며칠 앞으로 다가온 보궐선거를 위한 선거운동이 한가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여야 정당의 후보들은 제법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거리에 나선 후보들과 운동원들에게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자신들의 주말을 즐기러 갈 뿐이었다.

이같이 대조적인 장면은 요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시민사회의 정치 수요의 폭발과 제도정치권의 무기력 사이의 괴리를, 혹은 우리의 정치적 과제와 능력 사이의 격차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괴리가 요즘 표출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정치질서의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우리는 이른바 1987년 체제 하에서 살아왔다. 선거 민주주의가 회복된 1987년 이래로 우리의 정치는 3김, 지역주의, 민주화 이데올로기, 소선거구제, 사당(私黨)정치 등의 요소들로 구성된 체제가 지배했다. 지난 10여년간 우리는 싫든 좋든 3김 체제를 통해 우리의 정치적 요구를 표출해왔다. 하지만 이 체제는 지난 대선을 계기로 급격하게 해체되기 시작했다. 3김은 퇴장했고 이들이 주도하던 지역주의는 약화되거나 변형되어 가고 있다. 또한 민주화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마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1987년 체제의 해체는 시대적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이다.

문제는 옛 것은 사라지고 없는데 새로운 정치질서는 아직 등장하지 못한 상태의 불안함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 위기의 본질인 것이다. 지난 대선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 과거의 질서를 해체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시민들의 요구를 결집하고 이들의 참여욕구를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구조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어떠한 정당구조, 선거제도, 정치이념이 거리의 대치를 공존의 정치로 담아낼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우리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과제를 풀어갈 1차적인 담당자는 제도 정치권이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현재의 여야 정당의 개혁파들이다. 제도 정치권이 중요한 까닭은 비제도권이 보완의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제도권의 포괄성, 구속력, 안정성을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 몇 달간 여야의 개혁파가 보여 온 궤적은 실망스럽다. 그래도 아직은 이들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사실 요즘의 현실은 제도권 개혁파에게 절호의 기회임에 분명하다. 아직도 퇴행적인 회귀를 꿈꾸는 세력들이 여야 정당에 상당수 남아 있지만, 이들의 저항에 비하면 새 정치를 바라는 시민들의 지지는 실로 강력하다. 따라서 강력하지만 흩어져 있는 시민들의 개혁 열망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비전과 전략만 제시한다면, 개혁파는 곧바로 정치개혁의 대세를 장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갈 때에 비로소 제도정치권은 오늘날 폭발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정치적 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는 개혁의 역사적 분기점 ▼

우리의 정치사를 돌아보면 1945년, 1960년, 1987년의 예에서 보듯이 중요한 고비마다 폭발적으로 제기되는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와 갈등을 제도정치권이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따라 이후의 큰 흐름이 결정되어 왔다. 올해는 분명 그 같은 역사적인 분기점의 하나가 될 것이며, 제도정치권의 개혁 능력과 그에 따른 수용 능력에 따라서 향후 10∼20년의 정치질서가 결정될 것이다. 물론 우리 역사가 가리키듯이 제도정치권에 주어지는 개혁의 시간은 생각만큼 길지 않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