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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국민의 정부]1부노무현의 大權가도 진입

입력 | 2003-04-23 17:46:00

민주당내에서도 소수파였던 노무현은 2002년 대선후보 국민경선은 물론 대선 과정에서도 ‘김심’을 업기위해 갖은 애를 썼다. 2001년 2월8일 해양수산부 장관시절 노무현이 청와대에서 DJ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1년 여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비서실을 통해 보고서 하나가 전달됐다.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고문이 전국을 다니면서 언론 세무조사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시점은 그해 2월부터 시작된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비판여론이 확산되면서 여당인 민주당 내에서조차 세무조사 회의론이 대두되던 상황이었다.

DJ로서는 노무현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DJ는 비서진을 시켜 노무현이 민주당 청원 연수원에서 당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 중 대(對)언론 관련 부분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구해 들어본 뒤 “훌륭한 내용”이라고 칭찬했다. 그 후 곧바로 “녹음테이프를 대량 복사해 민주당 전국 지방조직에 전파토록 하는 게 좋겠다”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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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연설녹음 테이프를 지방조직에 전파하라는 DJ의 지시는 결과적으로 노무현에게 부정적인 당내 세력의 반대 등 복잡한 역학관계 때문에 실행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이인제(李仁濟) 대세론’에 밀려 한참 뒤처져 있던 노무현이 탄력을 받는 계기로 작용했다.

실제 그 이전까지 노무현의 대권 행보는 조직과 자금 모든 면에서 당내 바닥 수준이었다.

노무현이 대권주자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시절, 그와 가깝게 지냈던 한 민주당 관계자의 증언. “노무현이 대권 포석을 두기 시작한 것은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해 낙선한 직후의 일이다. 낙선은 했지만 당시 ‘아름다운 패배’라고 해서 ‘노사모’가 결성되는 등 오히려 그의 주가가 올라가고 있었다. 노무현 캠프 내에서 진로 모색을 두고 서울시장 출마, 국회의원 재·보선 출마, 당 최고위원 경선 출마 등 격론이 벌어진 끝에 대권으로 직행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대권 직행’을 건의한 사람은 여론조사 전문가 출신으로 지난해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선대위의 기획본부 부실장을 지냈던 홍석기(洪碩基)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홍석기는 대권으로 직행하기 위해서는 최고위원 경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장관으로 들어가 행정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당시 노무현 캠프에 관계했던 L씨는 “처음에는 행정자치부와 보건복지부 장관을 생각했다. 특히 보건부 장관은 의약분업 혼선을 정면 돌파할 경우 대권 고지로 가는 강력한 승부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참모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쳤다. 노무현은 이때 SK텔레콤 부사장 출신인 M씨를 초빙해 ‘수업’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2000년 6월 29일 노무현은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입각을 위한 일종의 배수진인 셈이었다. 그러나 당시 권력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던 동교동 주류의 노무현에 대한 시각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L씨는 “노무현의 지인이 권노갑(權魯甲) 고문을 찾아가 노무현이 경선 출마를 포기했음을 설명하면서 보건부 장관 얘기를 꺼냈더니 권노갑은 ‘경선 포기와 장관이 무슨 관계냐’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노무현 캠프로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니었다. 다행히 다른 실세 K씨가 노무현의 사정을 이해하고 청와대에 강력 천거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낙착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 DJ의 차기정권 창출을 위한 그림 속에는 노무현이 이미 들어가 있었다. DJ는 2000년 8월 개각을 석달이나 앞둔 그해 5월경 개각에 대한 기초구상에 들어가면서 노무현을 개각 때 입각시켜 차기 대권주자군으로 관리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 핵심측근은 전했다.

아무튼 권노갑이 노무현에 대해 냉담했던 것은 당시 이미 김원길(金元吉) 의원을 보건부 장관 후보로 추천한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권 구도와도 무관치 않았다. 권노갑은 당시로서는 대권주자군의 선두에 서있던 이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실 이인제-권노갑 제휴 구도는 노무현으로서는 힘겨운 상대였다. 노무현은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최고위원 경선 과정에서 권노갑과 갈등을 빚게 된 한화갑(韓和甲)과의 연대를 적극 모색했다. 한 민주당 관계자의 증언. “당시 노무현 캠프의 참모들은 호남 주류인 민주당에서 노무현이 대권후보로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DJ의 적자’라는 상징성을 지니는 인물과 제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점에서 동교동계이면서도 구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가 덜한 한화갑은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배기선(裴基善) 의원 등이 노무현과 한화갑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배기선은 민주당이 정권 재창출을 하기 위해서는 비호남 출신, 그중에서도 영남 출신이 후보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노무현이 ‘영남후보론’을 내세워 대권에 도전키로 결심을 굳히면서 캠프 내에서는 참모진 및 자문그룹의 보강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2000년 6월 당시 노무현 캠프에는 이광재(李光宰) 안희정(安熙正) 등 ‘386’ 세대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인원만이 일하고 있었다. 한 참모의 표현을 빌리면 ‘캠프라고 할 것도 없는’ 한심한 상황이었다.

노무현 본인은 물론 이광재 안희정 등이 나서 ‘대선용 인재’들을 분주하게 캠프로 영입했다. 민주당 외곽 조직인 연청 사무총장 출신으로 동교동 구주류에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는 염동연(廉東淵) 민주당 인사위원회 위원이 노무현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노무현 캠프는 대통령비서실 관계자들과도 접촉을 확대해 정책기획수석비서관실 이종상(李宗相) 행정관 등 몇몇 청와대 인사들이 노무현 캠프와 연을 맺었다.

그러나 2001년 3월 해양부 장관을 물러나 대선을 준비하던 노무현에게 돌발적인 두 가지 악재가 닥쳤다. 그 하나는 대권-당권 분리를 전제로 제휴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걸었던 한화갑이 대권 출마 쪽으로 마음을 굳혀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한화갑은 대권 경선에 나섰다가 2002년 3월 광주경선에서 노무현 이인제에 이어 3등을 한 직후 대권레이스에서 도중하차해 당권 쪽으로 돌아섰다.

이와 관련해 당시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한화갑이 경선에서 도중하차한 뒤 당권으로 돌아선 배경에는 ‘영남 대권-호남 당권’구도를 만들겠다는 DJ의 의중이 암묵적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고 전했다.

또다른 악재는 2002년 11월 7일 DJ가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한 것이었다. 당시 노무현 캠프의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노무현 녹음테이프’ 이후 캠프 내에는 DJ의 지원에 대한 기대가 팽배했으나 DJ의 탈당으로 그 같은 희망이 무산돼 버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DJ의 탈당은 오히려 결과적으로 노무현이 대선후보로 자립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DJ의 당내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민주당이 당 개혁안 마련을 위한 진통을 겪은 끝에 대선후보 국민경선제를 도입했고 ‘영남후보’라는 명분과 대중적 지지도를 갖춘 노무현이 ‘도약’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심(金心)’의 향배는 대선 막바지까지 노무현 캠프가 신경 쓴 중요한 변수였다. 경선은 물론 대선운동 과정에서 노 후보측이 끝까지 DJ를 껴안는 태도를 보였던 것도 결국 결집된 호남표의 지원없이는 아무 일도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특히 2002년 6월 이후 노 후보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여권 내에서 정몽준(鄭夢準) 대안론이 불거지면서 노무현 캠프는 DJ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여부에 또다시 촉각을 곤두세우게 됐다.

한 관계자는 “당시 청와대를 포함한 여권에서는 정몽준을 대안으로 미는 분위기가 강했다. 청와대 내의 친노무현 인사는 김한정(金漢正) 대통령부속실장 정도에 불과하다는 말도 나왔다. 노무현 진영으로서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9월 말 현대의 대북송금 의혹이 불거지자 노무현 캠프에서는 “대북 송금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DJ가 이를 그대로 시인해 결과적으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 당선에 도움을 주려할지 모른다”는 관측까지 나돌았다.

이와 관련해 DJ 정부의 한 청와대 관계자는 “실제로 당시 노무현 캠프의 모 인사가 ‘코너에 몰린 청와대가 야당과 모종의 빅딜을 통해 노무현 고사(枯死)작전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음모설이 돌고 있다’는 얘기를 들고 와 정색을 하며 따진 일도 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김한정 실장은 “당시 청와대 사람들이 불안해하다보니 노무현이 뜨면 노무현, 정몽준이 뜨면 정몽준 하는 식의 분위기에 이리저리 쏠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경선으로 뽑은 후보를 흔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대세였다”고 주장했다.

▼盧캠프 살림꾼 3총사▼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이광재(李光宰) 대통령국정상황실장과 안희정(安熙正)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은 노 대통령이 적수공권(赤手空拳)이던 시절 고락을 같이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98년부터 이들과 알고 지낸 한 정치권 인사는 “당시 두 사람은 주로 벤처기업을 하는 학교 동창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부탁하는 등 캠프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허덕이고 있었다. 동창들이라야 고작 30대 중반인데, 그런 사람들이 무슨 큰 재력이 있었겠나. 그래도 쫓아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2000년 중반 이후 가시화한 ‘노무현 대선 캠프’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에도 두 사람이 중요 역할을 했다. 정치기획 회사 출신의 한 인사는 “2000년 가을 아는 선배의 소개로 노무현을 처음 만났는데, 그 자리에 이광재도 같이 나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광재가 선배에게 좋은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해서 마련된 자리라고 하더라”고 경험담을 소개했다.

이 즈음 노무현 캠프에 합류한 염동연(廉東淵) 민주당 인사위원회 위원은 30대의 젊은 나이인 이광재와 안희정이 상대하기에 버거운 중노년층 인사들을 상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여기에다 일단 ‘캠프’가 구성된 만큼 들어가는 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고민이었다. 당시 노무현 캠프에 관계했던 한 인사는 “노무현 캠프의 정치자금은 대개 소액 후원금이었다. 그것도 구하기가 쉽지 않아 후원을 얻기 위해 3인이 공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광재가 돈줄을 파악해오면 염동연이 교섭하고 안희정이 마무리하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홍찬선 김동원 박중현 김두영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