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기업에서 제너럴일렉트릭(GE)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잭 웰치나 IBM의 CEO였던 루 거스너 같은 ‘스타 CEO’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차이를 외향적이고 과시적인 앵글로 색슨 민족과 내성적이고 자기 표현을 절제하는 게르만 민족의 차이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주주 대표가 CEO와 경영진을 철저히 견제하는 독일식 기업지배구조 속에 숨어 있다.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적 기업 BMW와 지멘스의 이사회 시스템을 보면 이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이원적 이사회로 경영감시하는 BMW=메르세데스 벤츠와 세계 고급 자동차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BMW의 이사회 시스템은 2개의 대립되는 축으로 이뤄져 있다.
헬무트 팡케 회장을 포함, 7명으로 구성된 ‘경영이사회(board of management)’는 BMW승용차와 영국에서 인수한 소형차 브랜드인 로버, 최고급승용차 브랜드인 롤스로이스 등 3개의 브랜드를 거느리며 직접 경영한다.
이에 맞서는 것이 경영이사진의 경영활동을 견제하고 경영이사의 임명권을 갖는 ‘감독이사회(supervisory board)’. 주주측 대표 10명 및 독일의 자동차 노조와 BMW 사원들이 추천한 노조측 대표 10명 등 20명으로 구성돼 있다. 주주와 노조측 의견이 대립하면 주주측인 감사위원회 의장이 캐스팅 보트를 행사한다.
BMW의 감독이사회는 경영투명성 감시측면에서 독일 내에서도 ‘강성’에 속한다. 2000년 감독이사회는 로버를 인수한 뒤 연속적자를 낸 책임을 물어 피셔츠리더 전 회장을 전격 경질, 세계 경영계에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경영 투명성 측면에서 독일 기업 가운데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BMW지만 지분구조는 ‘콴트(Quandt) 패밀리’가 최대주주인 ‘가족기업’에 가깝다. 최대주주인 고(故) 헤르베르트 콴트의 뒤를 이어 그의 부인과 1남1녀의 유족이 50%의 지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들인 슈테판 콴트가 감독이사회 이사로 참여할 뿐 대주주는 경영에 간여하지 않는다.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의연히 대처했던 콴트 패밀리에 임직원 모두가 강한 ‘신뢰’를 갖고 있다. 콴트 패밀리는 “어려움이 있어도 종업원 해고는 반대한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임직원들로부터 강한 신뢰를 받고 있다. BMW는 노조의 입김이 센 유럽에서 드물게 18년째 노사분규가 없는 기업이다. BMW의 경영이사회 멤버인 에른스트 바우만 이사는 “주주뿐 아니라 종업원 소비자 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stakeholder)를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BMW의 철학”이라며 “지난해 BMW는 유럽 기업 가운데 최고 수준인 138%의 이익분배금(Profit Sharing)을 나눠줘 임직원의 노력에 보답했다”고 말했다.
BMW는 미국 기업에서 일반화된 스톡옵션(주식매수청구권)은 도입할 계획이 없다. 스톡옵션이 경영진에게 기업성과를 과대포장하도록 유혹한다는 것이 이유다.
▽지멘스 “기업의 모든 결정은 4개의 눈으로”=지멘스는 발전설비 자동화설비 정보통신기기 운송장비 의료기 조명 등 15개의 사업부를 포함한 거대 다국적 기업으로 세계시장에서 미국의 GE 등과 경쟁하고 있다.
지멘스 역시 BMW와 마찬가지로 13명의 경영이사회와 20명의 감독이사회를 두고 있다. 독일의 상법과 프랑크푸르트 증시 상장규정은 일정규모 이상 기업의 감독이사회 조직을 숫자까지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은행과 보험사 등이 대주주로 감독이사회에 참여해 경영을 감시하고 있으며 우리사주는 10% 정도. 2%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는 창업가문도 1명의 감독이사회 이사로 참여할 뿐이다.
지난해 미국 엔론사태 이후 지멘스 안에서도 경영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졌다. 하인리히 폰 피어러 회장은 최근 오랫동안 지멘스가 지켜왔던 ‘우리는 우리가 말한 것을 지킨다(We do what we say)’는 모토를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말한다(We say what we do)’라고 슬로건으로 바꾸기도 했다. 투명경영 원칙을 강조한 것이다.
‘포 아이즈 프린시플(Four Eyes Principle)’은 지멘스의 투명경영의 방향을 명확히 보여주는 대표적 원칙이다. 기업의 모든 결정은 서로 견제할 수 있는 두 개 부서의 관계자(2명·4개의 눈)가 확인하고 동의해야 비로소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경영이사회와 감독이사회로 이사회를 나누듯 위험성을 제도적으로 방지하자는 독일식 투명경영 기법인 셈이다.
193개국에 42만6000여명의 종업원을 둔 ‘글로벌 기업’인 지멘스는 BMW에 비해 미국식 제도를 많이 흡수하고 있다. 지멘스 경영이사회의 발터 후버 인사담당 이사는 “몇 년 전부터 스톡옵션 제도를 도입, 3000여명의 임직원에게 스톡옵션을 줘 성과중심 경영을 확대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구조조정을 통해 직원수를 크게 줄였다”고 말했다.
뮌헨(독일)=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지멘스의 '기업책임보고서'▼
“지멘스가 기업의 미래를 지켜갈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이웃으로서 공동체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기업책임보고서’(Corporate Responsibility Report)를 통해 여러분에게 알렸으면 한다.”
독일 지멘스의 하인리히 폰 피어러 회장이 2002년을 결산하는 기업책임보고서의 서문에서 밝힌 이야기다. 이 기업책임보고서는 올해 초 정기주총에서 지난해 기업의 실적을 보고하는 연례 사업보고서와 함께 묶여져 나왔다.
최근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유럽 특유의 기업윤리 움직임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CSR)’에 발맞추기 위한 지멘스의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거의 전세계 모든 국가에 진출해 있는 지멘스는 이런 노력을 통해 자기 기업이 각 지역사회의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ship)’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
연례 사업보고서가 주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한 해 동안의 경제적 실적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 기업책임보고서는 주주뿐 아니라 고객 종업원 지역사회 정부 등 모든 이해관계자(stakeholder)에 어떤 의무를 다했는지 보여주기 위한 종합 보고서인 셈.
보고서는 △고객만족을 위해 추진한 혁신노력 △우수인력 채용노력과 직원교육투자 △환경분야의 구체적 성과 △산업안전과 직원의 건강을 위한 회사의 투자 △대학 등 학교교육과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 △국제적 자선활동에 참여한 실적 △음악, 미술 등 예술분야에 대한 지원 등 한 해 동안 지멘스가 사회를 위해 공헌한 내용을 국가별, 항목별로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담고 있다.
지멘스의 홍보담당자인 안드레이스 피셔는 “유럽사회는 더욱 더 기업이 사회에 대해 어떤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묻고 있다”면서 “투자자들도 윤리적이고 투명성이 높은 기업에 우선적으로 투자하는 ‘사회적 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를 늘리고 있어 실제 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도 이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뮌헨(독일)=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정관선 교수 기고▼
미국의 이사회가 ‘단일 이사회’라면 서유럽, 특히 독일의 이사회는 ‘이원적(二元的) 이사회’라고 할 수 있다. 미국식 이사회가 하나의 이사회 안에 일반주주를 대표하는 사외이사를 참여시켜 최고경영자(CEO) 등 경영진을 견제한다면 독일은 경영이사회와 법적으로 분리된 감독이사회를 만들어 경영진을 견제하도록 한 것이다.
독일의 상법은 감독이사가 경영이사를 겸직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소유와 경영을 분리시키고 있다. 특히 감독이사회가 CEO를 포함한 경영이사의 선임권을 갖기 때문에 대주주는 주로 감독이사회에 포진하고 전문경영인이 경영이사를 맡게 된다.
이런 독일식 이사회 구조에서는 경영성과가 나쁘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한 CEO나 경영진의 경질이 쉬워진다. 이는 CEO가 이사회 의장을 겸하면서 경영진 인사권 등 강력한 권한을 갖는 미국식 이사회나 대주주 경영자가 이사회 구성를 좌우하는 한국의 이사회에서는 쉽지 않은 일. 또 미국 엔론 사태의 문제점으로 지적됐던 ‘CEO의 독재’나 ‘친(親)CEO적 사외이사’를 예방하고 CEO의 ‘책임경영’을 가능케 하는 장점이 있다.
또 독일의 감독이사회에는 주주대표와 함께 노조추천 대표가 같은 숫자로 참가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이 강한 독일의 특징으로 경영이사회와 분리된 감독이사회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미국식 단일 이사회에 노조, 채권자 대표 등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한다면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가 달라 경영의 효율성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독일 시스템이 항상 매끄럽게 가동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의사결정에만 참여하는 감독이사회는 아무래도 일상적인 경영활동을 수행하는 경영진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기 쉽다. 이 때문에 당초 취지와는 달리 감독이사회가 경영이사회를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약점도 있다. 은행이 기업의 지분을 많이 갖고 있는 독일식 소유구조에 따른 문제점이다. 은행이 기업의 감독이사회에 참여하고 기업의 대표는 반대로 은행의 감독이사회에 참여하면서 서로 담합할 우려가 있는 것. 책임추궁이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현재는 유럽식 이사회 시스템과 미국식 시스템이 ‘주주가치의 극대화’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는 추세다. 독일 기업의 감독이사회 역할이 강화되는 것도 미국 기업에서 사외이사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미국 시스템을 따르고 있는 한국의 기업은 ‘오너’로부터 독립돼 일반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외이사의 비중을 대폭 높이고 역할을 강화해 세계적 추세에 발맞춰야 할 것이다.
정관선 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 원장(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