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일부 국민은 “사스라는 병보다 이 병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죽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감기처럼 전파가 잘 되고 치사율이 10%를 훨씬 넘는다는 근거가 희박한 소문이 증폭되고 있다. 중국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이 전하는 온갖 풍문이 공포감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만 한해 3만명이 독감으로 숨지는 현실에 비추어 사스 공포가 과장됐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본보는 28일 국립보건원 사스대책자문위원회 위원장인 박승철(朴陞哲) 고려대 의대 교수와 대한감염학회 학술부장인 오명돈(吳明燉) 서울대 의대 교수, 국립인천공항검역소 이종구(李鍾求) 소장 등 전문가 3명의 긴급 좌담을 마련해 사스의 실체와 대책 등에 대해 알아봤다. 이를 이슈별로 정리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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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감염자 있나▼
전문가 3명은 아직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사스 환자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사스의 원인체인 변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적어도 10명은 될 것이라는 데 대체로 공감했다.
미국의 경우 사스가 나타난 지난해 말 이후 중국을 왕래한 인원이 62만명 정도로 이 중 사스 의심환자가 200여명, 추정 환자가 42명 발생했다. 한국은 같은 기간에 15만여명이 중국과 홍콩을 다녀왔기 때문에 이런 비율로 따지면 10명 정도의 감염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들은 또 중합효소면역반응(PCR)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인 5명도 감염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지만 감염자가 곧 환자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오 교수는 “독일에서 개발한 PCR법은 변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증식할 때 나오는 폴리머라제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증폭시킨 것과 의심 환자의 가검물에서 나온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비교하는 것”이라며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조만간 바이러스를 배양해 성질을 분석한 결과가 나오면 감염자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스 감염자가 있다고 공포에 질릴 필요는 없다. 에이즈 감염자가 환자가 아닌 것처럼 사스 감염자라고 해서 환자는 아니다. 중국에서는 사스를 ‘비정형 폐렴’으로 부른다. 이는 사스가 폐렴의 일종이며 폐렴 증세가 없으면 환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바이러스 감염자가 바이러스를 퍼뜨릴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불치병' 인가▼
사스 격리병원 지정 움직임에 대해 주민들이 패닉 현상을 보일 정도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지만 사스는 크게 우려할 만한 병은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다.
오 교수는 “사스뿐 아니라 페스트, 에이즈 등 모든 신종 전염병은 인류의 공포였다”면서 신종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사스만의 특징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사실 사스라는 이름 때문에 일반인들이 공포감을 갖는 측면도 있다. 일본에서는 ‘비정형 폐렴’, ‘신종 폐렴’, ‘신종 호흡기 질환’ 등으로 부르는데 이렇게 부르면 공포감이 덜 하지 않을까.”(이 소장)
박 교수는 “모든 전쟁이 그렇듯 사스와의 전쟁에서도 피해자는 생기게 마련이지만 사스는 태풍으로 치면 ‘C급 태풍’으로 치유가 불가능한 병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지금까지의 감염 행태를 볼 때 1만명이 걸리면 9000명은 아무 증세 없이 지나가고, 900명 가량은 감기나 독감을 앓는 것처럼 앓다가 자연 치유되며 100명에게만 폐렴이 생겨 이 중 5, 6명이 숨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사스 감염자 △사스 독감자 △사스 폐렴 환자의 세 단계로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현재 사스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는 치료약은 없지만 폐렴을 대증요법으로 치유하면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세균성 폐렴이 아닌 ‘비정형 폐렴’의 대부분을 이런 방법으로 치유하고 있다는 설명.
이들 전문가는 사스는 환자와 직접 대면하는 의료진과 환자의 가족에게 대부분 전염되며 일반인이 전염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입을 모은다. 따라서 사스는 ‘의료진의 병’이며 일반인들은 근거 없이 공포에 떨 필요는 없다는 것.
전문가들은 의사나 환자 가족이 아닌 사람이 이 병에 감염된 경우는 대부분 병원에서 감염된 경우라며 길거리나 지하철 등에서 감염된 사례는 없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중국처럼 초기에 발병 사실을 숨기다가 병을 키운 나라를 제외하고는 사스 환자가 생겼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정부대처 문제점▼
그렇다고 사스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사스 감염자나 환자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초기에 진압하면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반면 방치하면 중국처럼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생긴다는 설명이다.
특히 사스에 대한 대처능력이 국가의 위기관리 능력과 직결되고 향후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범국가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오 교수와 박 교수는 이런 면에서 한국 정부의 대처가 소극적이라고 주장했다. 보건복지부와 국립보건원이 방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28일 총리 주재의 사스 대책회의가 열렸지만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
한국에선 사스 환자를 격리해 치료할 시스템을 갖춘 곳이 단 한군데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의심환자를 격리할 격리병원도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아직 지정되지 못하고 있다. 박 교수는 “사스 환자가 생겨도 갈 곳이 없다”고 개탄했다.
박 교수는 “대통령이 통치 차원에서 ‘사스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국가 재난 차원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스 대처와 경제력은 큰 관계가 없다. 베트남은 환자 60명 발생 선에서 확산 방지에 성공한 반면 홍콩과 캐나다의 토론토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우리도 경제력을 탓하기 전에 최선을 다하면 사스는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오 교수)
정부 뿐 아니라 국민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 소장은 “입국 때 병이 잠복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검역으로 환자를 100% 찾아낼 수는 없다”면서 “사스 위험지역에서 귀국한 뒤 고열이 생기면 즉시 당국에 신고해 병이 확산되지 않도록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이 막연한 공포를 갖고 격리병원 지정에 반대하기 보다는 손을 깨끗이 씻는 등 위생에 보다 철저히 하는 것이 좋다.
현 단계에서는 사스가 ‘의료진의 병’인 만큼 병원을 통해 확산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전문가들은 의견을 같이 했다. 즉 병원에서의 2차 감염을 막지 못하면 의료진과 접촉하는 사람에게 발생하는 3차 감염을 막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국가가 감염 의심자를 지정 병원에 강제 격리시켰을 때 병원 감염 등에 대해서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을 강조하는 의견도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스 위기를 계기로 보건 관계 법령을 정비하고 국립보건원의 위상을 높이는 등 국가적 전염병 관리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세기에 들어 항생제와 백신 등이 등장하자 전염병이 곧 정복될 것으로 믿었지만 실은 인류가 전염병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이번 사스 사태를 통해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이 전염병에 잘 대처하는 것은 지금까지 생물테러에 대비해 꾸준한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염병이라는 ‘테러’에 맞설 강력한 방어 시스템을 갖춘 나라는 번영하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는 결국 쇄락할 것이다. 한국도 선택의 기로에 있다.”(박 교수)
사회=정성희 사회2부 차장 shchung@donga.com
정리=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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