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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김정태 국민은행장

입력 | 2003-04-29 19:55:00

2000년 10월3일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열린 주택은행의 뉴욕증시 상장식. 김정태 행장(왼쪽)이 직원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김정태 국민은행장은 지난 수년간 과감한 발탁 인사로 화제를 모았다. 발탁된 ‘숨은 인재’들 중 상당수는 탁월한 실적으로 김 행장의 안목에 보답했다.

그에겐 사람을 감별하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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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행장은 29일 “특별한 비법은 없고, 믿을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듣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 같다”고 말했다. 많이 듣고 심사숙고해서 일단 선택하면 철저히 믿고 힘을 실어준다는 것. 해보고 싶은 모든 걸 하게 놓아둔다고 한다.

때로는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도, 선택을 위해 고민해야 할 것을 다했다고 판단되면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국민투신운용 백경호(白暻昊) 사장 발탁도 그런 사례. 김 행장은 1998년 9월 10조원대의 채권투자 업무를 전담할 자본시장실을 신설했다. 한 증권사 간부가 SK증권의 채권 전문가인 백씨를 추천했다. 나이는 어리지만(당시 37세) 채권 업무에 정통하며, 책임감이 강하다는 얘기였다. 채권 관련 이력과 실적을 꼼꼼히 분석하고 주변의 평판을 수집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백씨를 불러 “자네에게 내 운명을 걸었다”고 비장하게 말하며 ‘도박’을 감행했다.

백 실장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연 15% 이상의 고수익을 올리는 등 훌륭한 실적을 냈다. 김 행장은 2000년 2월 그를 부행장 직무대행으로 승진시키면서 자본시장본부장을 맡겼다. 39세라는 파격적으로 어린 나이 때문에 겉돌거나 불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백씨는 겸손함과 친화력으로 위아래와 어울렸다. 김 행장은 “이 일로 조직융화는 나이와 무관함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백씨는 이어 그해 6월에 국민투신운용 대표이사로 발탁됐다.

김 행장은 “돌이켜보면 주변 사람들의 말을 충분히 듣고 선택하는 발탁 방식의 성공 확률은 비교적 높았다”고 자평하면서도 “그렇지만 사람 감별에 ‘왕도’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 나름의 판단 우선순위는 있지 않을까.

김 행장은 새로운 일을 적극적으로 해내는 사람을 선호대상으로 꼽았다. 빈틈은 없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게 없는 스타일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었다. “뭐 하나를 해보라고 주면 메모 들고 뛰어와 ‘그건 이겁니다’라고 해야지요. 다 지나서 그래프까지 넣은 예쁜 보고서를 들고 와봤자 뭐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속도와 결과지요.”

김영일, 신기섭 부행장 발탁(4월28일자 기사 참조) 사례에서 보여줬듯 고분고분한지, 윗사람의 의중을 잘 따르는지 여부, 그리고 이른바 ‘사내정치(社內政治)’ 능력에는 별로 영향받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김 행장은 그러나 “솔직히 지금도 사람을 고르는 건 자신이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33세 때 상무(대신증권)가 된 후 20년이 넘게 수많은 인사에 관여해 왔지만 판단이 안 설 때가 많다는 것. 특히 사람을 볼 때 주관적 인상 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토로했다.

“예를 들어 신입 사원 면접에 들어가 보면 첫인상이 어두운 사람보다는 밝은 사람을 택하게 돼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이라도 10분 이상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첫인상이 변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지요. 그만큼 느낌만으로 판단하는 건 위험하다는 건데….”

그렇지만 정말 탁월한 인재감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고 한다.

동원증권 때 데리고 있던 정태석(鄭泰錫) 교보증권 사장이 그 예다. “일을 시켜보면 뭐든지 더 새롭고 정확한 방법을 찾아내더라고요. 시장상황을 물어보면 ‘좋다’ ‘나쁘다’ 식으로 대답하는 게 보통 간부들인데, 정 사장은 확실히 분석해서 브리핑하더군요. 조사부를 뒤지며 자료 검증을 받더라고요. 매매 패턴도 보통 직원들하고 달리 새로운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동원증권 전무 시절 채용한 박현주(朴炫柱) 미래에셋 회장도 특히 기억나는 인재였다. 어느 날 찾아 온 박씨는 고교친구인 박영영의 동생인데 기억하시겠느냐며, 자기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대리인데 과장급을 시켜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김 행장은 “당신을 본 기억이 안 난다”고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뭔가 심상치 않은 ‘끼’를 느꼈다. 김 행장의 표현을 빌리면 동원증권에 들어온 박씨는 ‘날아다닐’ 정도로 뛰어나게 일을 해내는 ‘대단한 놈’이었다.

김 행장은 “지금까지 숱한 사람을 거치면서 느낀 건데 리더감이 될 사람에게선 그럴 소질이 엿보였다”고 말했다. 시쳇말로 ‘내공(內功)’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기홍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