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직전인 12월13일 노무현 정몽준 두 사람이 국회에서 대선후 국정운영 공조방안 등에 합의한 뒤 서로 포옹하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16대 대통령 선거전의 열기가 한창 달아오르던 2002년 10월 중순. 지방 행사에 참석했다가 승용차편으로 상경하던 정대철(鄭大哲) 민주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었다.
DJ는 경성그룹 불법 로비사건으로 기소됐던 정대철이 며칠 전인 10월 8일 대법원에서 일부 무죄 취지 판결을 받아 의원직 상실 위기를 넘긴 일을 들어 “하여튼 재판 결과가 잘됐다. 고생했다”고 위로했다. “대통령님께서 염려해준 덕분입니다”고 대답하는 정대철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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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는 이어 정치 얘기로 화제를 돌리며 “당이 시끄러운 것 같은데 자네가 잘 추슬러야 하네”라고 말했다. DJ의 당부는 민주당 내 비노(非盧)-반노(反盧)측 의원 34명이 10월 4일 ‘대통령후보 단일화 추진협의회(후단협)’를 구성,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를 압박하는 등 분당(分黨) 양상으로 치닫고 있던 당내 상황을 우려한 것처럼 정대철에게는 들렸다. 10분가량의 전화통화 말미에 DJ는 “꼭 이겨야 하네”라고 다짐 받듯 말했다.
이 한마디로 정대철은 ‘김심(金心·DJ의 의중)은 노무현에게 있다’고 확신하게 됐다. 그 후 정대철은 핵심 측근과 당내 의원들에게 이 통화 내용을 전하며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후보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는 일부 동교동계나 후단협 의원들은 ‘김심’을 모르고 경거망동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정대철의 한 측근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선대위원장으로 내정된 9월 중순 때까지만 해도 정대철은 측근 모임에서 ‘설마 했는데 청와대가 정말 아무것도 안 도와준다. 1원 한 푼 보태줄 생각도 안 한다. 청와대는 누가 되든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고 말하며 섭섭함을 토로했다. 이런 상황이었던 만큼 DJ의 한마디는 당시 노무현 캠프에 큰 힘이 됐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정대철의 설명과 다른 해석도 적지 않다. DJ의 청와대가 오로지 ‘노무현 승리’에만 매달렸다기보다는 지지율 등락에 따라 노무현에서 정몽준으로, 다시 노무현으로 오락가락하는 양상을 보인 게 더 정확한 상황이었다는 게 여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2002년 3월16일 민주당 광주 경선에서 노무현이 1위를 차지한 후 노무현의 인기가 치솟기 시작할 무렵 청와대에서는 수석비서관부터 행정관까지 “노무현이 대단하다. 언젠가 그렇게 뜰 줄 알았다”는 식의 ‘노무현 찬가’가 유행했다.
당시 노 후보 캠프의 핵심 실세였던 유종필(柳鍾珌) 전 후보공보특보는 “4월 중순 이후에는 고교(광주일고) 선배인 조순용(趙淳容)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이 나를 통해 노무현에 대한 DJ의 조언을 전달해 오곤 했다. ‘주한미군 문제는 신중하게 발언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노무현도 DJ의 조언을 고맙게 생각하고 수용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나 5월 이후 노무현의 인기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자 상황은 일변했다. 6·13지방선거와 8·8국회의원 재·보선 이후 노무현의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지자 청와대에서는 “정몽준으로 단일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왔다. 심지어 “노무현으로는 절대 안 된다. 노무현도 현실을 본다면 당연히 후보를 내놓아야지 계속 버티기를 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냐”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당시 박지원(朴智元) 대통령비서실장도 사석에서 “정몽준 후보는 능력 있는 분이다”며 은근히 정몽준에게 기대를 거는 듯한 말을 하곤 했다.
노무현 캠프도 ‘정풍(鄭風·정몽준 바람)’의 배후에 청와대, 특히 박지원이 있다는 강한 의심을 갖고 있었다.
선대위 홍보본부장인 김경재(金景梓) 의원은 10월23일 국회의사당 로비에서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하는 박지원과 우연히 마주치자 “당신들 왜 자꾸 정몽준을 띄우고 그래. 정몽준은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 아니냐”며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청와대가 노무현에 대해 부정적 분위기로 돌아선 이면에는 노무현측이 ‘탈 DJ’를 거론한 데 대한 반감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에 앞서 7월4일 노무현은 선거중립내각 구성과 ‘홍(弘)3 게이트’ 및 아태재단 문제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촉구하는 ‘탈 DJ’ 기자회견을 전격적으로 가졌다. 7월23일에는 일본 언론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햇볕정책에 대해 “핵심 내용에는 동의하지만 시행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고 한계에 봉착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이 ‘탈 DJ’로 해석돼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아무튼 DJ의 청와대가 이처럼 노무현과 정몽준을 오락가락하게 된 배경에 대해 DJ의 한 핵심 측근은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청와대 사람들은 이회창이 될까 봐 공포심에 가까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지방선거와 보선을 치르면서 여권 내에는 절망적인 분위기가 확산됐다. 물론 DJ 자신은 국민경선을 통해 선출된 후보를 흔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확실히 갖고 있었던 듯하지만 청와대 관계자들 중에는 정몽준으로의 단일화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런 혼선의 바탕에는 바로 정권을 뺏기면 절멸(絶滅)이란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고위 관계자 K씨의 설명은 좀 다르다. DJ가 당시 한화갑(韓和甲) 민주당대표, 정균환(鄭均桓) 원내총무, 한광옥(韓光玉) 최고위원 등 직계 인사들을 동원해 노무현-정몽준 사이에서 철저하게 ‘이중 플레이’를 했다는 주장이다. “한화갑이 노무현에 대해 ‘햇볕정책 공부 좀 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종종 비판적인 발언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한화갑이 끝까지 당 대표를 지킨 것은 DJ의 주문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DJ가 한화갑에게는 끝까지 당을 관리하고, 한광옥에게는 노무현을 돕고, 정균환에게는 후단협을 통해 정몽준을 간접 지원하라는 식으로 역할 분담을 시켰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그렇게 해서 노무현과 정몽준을 막판까지 끌고 가 극적인 후보단일화를 이뤄내야 이회창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청와대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청와대는 노무현이든 정몽준이든 이회창만 이기면 그만이라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와 관련, 민주당 김원기(金元基) 고문은 2002년 10월 말 민주당 선대위 본부장단 회의에서 “얼마 전 한 대표와 술을 마셨는데 나에게 ‘형님, 제가 두 번이나 탈당하려다 안한 사람입니다’라며 자랑처럼 말하더라”고 털어놓은 일이 있다.
이 회의에서 다른 참석자는 “8월말 DJ가 한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끝까지 민주당을 지켜라. 당신이 당을 떠나면 내가 뭐가 되느냐’고 당부했다는 설이 있다. 이 때문에 한 대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화갑은 “DJ는 정치 불개입 원칙을 지키면서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다. 또 내가 당 대표인데 탈당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나는 나중에 노무현으로부터 토사구팽을 당하더라도 당을 지킨다는 확실한 생각이 있었다. 내가 노무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정몽준측에 ‘후보단일화만이 살 길이다’고 설득하기도 했다”고 반박했다.
이 같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대선 과정을 전체적으로 보면 DJ는 노무현에 대해 우호적이었다는 것이 양측의 공통된 평가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 비서실장이던 신계륜(申溪輪) 의원은 “선거전이 본격화된 뒤 DJ는 선대위를 참 편하게 해줬다. 선거 전략상 ‘3김 정치 청산’ 등을 외칠 때 DJ에게 가끔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지만 특별히 ‘김심’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노무현도 DJ에 대해서는 늘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盧 경선승리 공신 유종필▼
2001년 6월 노무현 대통령후보 경선 캠프에 합류한 유종필 공보특보(사진)의 지상과제는 당시 여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인제(李仁濟) 대세론’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다. 당시 민주당 권노갑(權魯甲) 고문을 필두로 동교동계가 이인제를 민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유종필은 캠프에 합류한 직후부터 경선이 본격화된 2002년 3월까지 한달에 한두 번 꼴로 청와대로 박지원을 찾아갔다.
유종필은 “지금처럼 권노갑이 이인제를 공개적으로 밀면 ‘김심은 이인제’라고 모두 받아들인다. 권노갑이 그런 활동을 못하도록 막아 달라. 그렇지 않으면 노무현은 이런 들러리 경선을 보이콧할 것이다”고 엄포를 놨다. ‘경선 보이콧’은 노무현에게 사전 양해도 받지 않은 표현이었다.
박지원은 유종필의 이런 항의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을 수첩에 받아 적으며 “DJ에게 분명히 전달하겠다. DJ와 나는 100% 중립이다”고 말했다.
유종필은 또 박지원에게 ‘노무현이야말로 DJ 철학과 정책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역설했다.
“노무현은 역사를 생각하는 대정치인으로서의 DJ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DJ의 정책 중 남북화해협력정책과 생산적 사회복지정책은 반드시 계승할 것이다. 만일 노무현이 DJ를 배신하면 나부터도 그 캠프에 있을 이유가 없다.”
유종필이 박지원과 이처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간의 독특한 인연 때문. 95년 박지원이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을 할 때 유종필은 그 밑에서 부대변인을 했다. 특히 2001년 박지원이 한빛은행(현 우리은행) 불법대출사건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갈 때 유종필은 청문회 준비 실무팀장을 맡았다.
이 때문에 노무현이 민주당 광주 경선에서 승리하며 ‘이인제 대세론’을 꺾자, 이인제측은 박지원이 유종필을 노무현 캠프에 심었다고 ‘청와대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유종필은 경선 과정에서는 ‘1등 공신’으로서의 역할을 했으나 8·8 재·보선 출마를 둘러싼 갈등으로 노무현 캠프와 소원해져 현재는 내년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 출마를 목표로 표밭을 갈고 있다.
▼특별취재팀▼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홍찬선 김동원 박중현 김두영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