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하,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솔)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 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허만하,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봄은 봄이다. 가장 게으른 감나무 움이 돋고 대추나무에 뿔 나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친정아버지 오는 것도 무섭다던 보릿고개의 시작을 알리던 것들이지만, 봄은 죽은 척 시치미 떼곤 하는 저것들이 깨어나야 비로소 완성된다. 지구의 한쪽에선 꽃 대신 목숨이 질 동안에도 이곳 온 산과 들에 봄날은 화창하였다.
봄이 가장 늦게 도착하는,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도시의 가장 낮은 곳을 거닐던 시인은 화분 대용 스티로폼 상자에 꽂아 놓은 나무꼬챙이를 보고 발길을 멈추었다. 나팔꽃 꽃씨일 거라 지레짐작하지만 붉은 흙 속에 심겨진 씨앗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나무꼬챙이를 타고 올라갈 덩굴식물인 듯하다. 꼬챙이는 ‘수직’이며 덩굴식물 또한 ‘상승’ 의지의 표현이다. 재크가 타고 올라간 콩나무며 겨우내 병상에 누운 소녀를 일으켜 세운 완두콩덩굴을 기억하는가? 그러나 시인이 발견한 것은 나팔꽃 또는 완두콩덩굴의 높이가 아니라 저 씨앗을 심은 가장 낮은 이의 손이다.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 간난의 세월을 꼭꼭 화분에 눌러 담고 꼬챙이를 꽂아준 그 마음이 뭉클하여 시인은 중얼거린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세계가 병든 소녀라면 세상에 어떤 신통한 개구쟁이가 있어 세계를 일으켜 세울 완두콩알 하나 고무총으로 쏘아줄 수 있을까. 구원은 튼튼하고 완강한 쇠밧줄이 아니라 저 스티로폼 폐품상자에서 나올 나팔꽃덩굴일까? 저 시인은 또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물이 얼마나 ‘더 많이 젖은 곳’으로, ‘더 많이 고인 대해’로 흘러가고 있는 줄 모르고 하는 소린가?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르고, 불은 등 시린 쪽으로 번지고, 풀은 사막 쪽으로 달려가고, 눈물은 아름다움 쪽으로 흐르는 곳은 어디이며, 우리에게 가능한가? 세상이 아플수록 꿈꾸는 것이 시라는 물건인즉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곳을, 가장 슬픈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두엄에서 꽃을, 꽃에서 두엄을 맡을 줄 아는 이라면 그 모든 이가 바로 시인일 것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높이는 깊이다. ‘전망’이 삶과 유리된 것이라면 ‘깊이’는 삶 자체이다. 가자, 아침 노을을 가장 먼저 발견하러.
반칠환 시인
▼알림▼이달부터 시인 반칠환 조은씨가 번갈아 집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