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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미국만들기'…"도덕적인 나라 거듭나라"

입력 | 2003-05-02 17:49:00


◇미국만들기/리처드 로티 지음 임옥희 옮김/216쪽 1만원 동문선

9·11테러 이후 미국이 벌인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전쟁 과정에서 우리는 놈 촘스키류의 미국 지식인들이 미국을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국가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많이 들었다. 이들에게 미국은 악마의 나라다. 이들이 보기에 미국에 대한 자부심이란 세계 도처에 막강한 병력을 급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라임을 기뻐하는 쇼비니스트에게나 어울린다.

로티는 이 같은 생각을 하는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미국이 과거에 저지른(또는 현재 저지르고 있는) 악행에 대해 그렇게 절망하고 냉소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런 실천에도 나서지 않는 것이 스스로가 속한 공동체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인가?”

‘철학에 대한 민주주의의 우위’를 역설해 온 미국의 철학자 로티는 이 책(원제 Achieving Our Country)을 통해 미국을 민주적 도덕적인 나라로 만들기 위한 미국 내 범좌파세력의 연대를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연대는 미국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미국에 대한 희망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티는 민주주의를 어떤 고귀한 이념의 실현이나 신의 섭리에 의해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철저히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실험이라고 여긴 월트 휘트먼과 존 듀이의 관점을 되살리려 한다.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로티는 미국의 민주주의적 기획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그것을 완성시켜야 할 사명이 미국의 지식인들과 시민들에게 있다고 보고 있다.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해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를 민주주의적 기획의 완성이라는 실천적 과제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좌파의 생명은 실천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미국의 좌파가 그 같은 실천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로티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세계경찰 노릇을 포기하고 도덕적으로 건강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로티는 민주주의적 프로젝트가 목표로 삼아야 할 사회라고 믿는다.

로티에 의하면 미국의 좌파는 1960년대를 거치면서 지식인과 노동조합간의 동맹이 깨지면서 방관자적 태도를 취하게 됐고 결국 실천력을 상실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강단의 좌파가 현실정치의 대체물로 문화정치학을 받아들이면서 좌파는 더 이상 좌파가 아니게 됐다는 것이다.

로티는 ‘좌파’와 ‘자유주의’의 용어 구분을 폐기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벗어난 새로운 좌·우파의 그림을 그려내려 한다. 로티가 말하는 좌파는 북유럽의 사회복지체제를 본받아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돌보는 정책을 촉구하는 소위 개량주의적 좌파다.

로티에 대한 비판자들의 주장대로, 이것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옹호론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실천력을 상실한 방관적 좌파만이 존재하는 미국 상황에서 로티의 주장은 미국적 쇼비니즘에 대항하기 위한 실천적 담론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는 좌파의 핵심적 이슈는 여전히 정치 경제적 문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티는 오늘날 미국에서 실천적 좌파의 과제가 세계화에 의한 문화적 획일성과 신자유주의에 따른 경제적 세습계급의 출현에 맞서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역자 후기의 로티 비판은 이런 요점을 놓친 것 같아 아쉬움을 남긴다.

이 유 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서양철학 yusunle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