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지난달 초 국회 국정연설에서 “지역구도는 반드시 해소되어야 한다. 지역구도를 이대로 두고는 우리 정치가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YS DJ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JP의 힘이 떨어졌다고 3김 시대가 극복된 것은 아니다. 세 김씨식 지역할거주의가 청산될 때 이른바 ‘87년 이후 체제’는 진정으로 종식될 수 있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지역구도의 밑그림을 그렸다면 87년 대선에서의 양김(兩金) 분열은 그것을 고착시켰다. 박 정권의 지역구도에서는 반(反)독재 연대나마 살아있었으나 양김 분열은 민주화 세력마저 지역세력으로 분화시켰다. 그렇게 해서 87년 이후 지역주의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DJ가 손 들어줄까 ▼
지난해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앞두고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노무현 깃발’을 들었던 천정배(千正培) 의원은 “따지고 보면 한국의 현실 정치인은 모두가 지역주의의 수혜자”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천 의원(경기 안산을)처럼 영호남 지역이 아니더라도 지역구 선거에서는 그 지역에 영남 호남 충청 출신이 얼마나 사느냐가 승패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이런 현실에서 정치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가기는 어렵다.
신당의 명분은 이런 구도를 깨자는 것이다. 전국정당화로 지역구도를 허물자는 것이니 그 명분을 탓할 수는 없다. 민주당 신기남(辛基南) 의원은 “이는 시대와 국민이 요구하는 것으로 성패를 떠나 결코 물러설 수 없다”고 비장하게 말한다. 그의 비장감을 폄훼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민주당의 신구 주류는 지금 ‘개혁신당’이냐, ‘통합신당’이냐를 놓고 싸우고 있다. 천 의원, 신 의원 등 이른바 신주류 강경파는 개혁에 비중을 둔다. 한마디로 모두가 기득권을 버리고 ‘헤쳐모여’를 하자는 것이다. 민주당을 해체하고 백지상태에서 그림을 다시 그릴 때만이 개혁세력을 한데 모을 수 있다는 것인데 개혁신당 김원웅(金元雄) 대표 역시 ‘헤쳐모여’가 합류의 전제조건이라고 못을 박는다.
“민주당을 리모델링하는 정도여서야 우리가 거기에 낄 수는 없다. 그래서야 한나라당의 개혁파 의원들도 참여할 명분을 찾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노 대통령이 “내년 총선에서 여당을 무리하게 과반수로 만들 생각이 없다”며 거드는 형국이니 신당의 주도권은 신주류 강경파가 쥔 셈이다. 그러나 대선 경선 이후 노 대통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김근태(金槿泰) 의원은 다른 말을 한다.
“신당에서 결국 특정세력이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오면 호남 대중이 실망과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전국정당화의 명분에도 맞지 않고 개혁세력을 왜소화할 것이다.”
다수 민주당 의원들은 곤혹스러울 것이다. 현역 의원의 프리미엄을 놓치고 싶지는 않지만 신주류 강경파의 명분이나 ‘내 속은 뻔하다’는 노 대통령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줄을 서기는 서야 할 텐데 어떤 줄이 내년 총선에서 유리할지 계산해 봐야 할 것이다. DJ가 과연 신당 손을 들어줄지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盧, 신당 참여하지 말아야 ▼
신당의 명분과 현실은 이렇듯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개혁과 통합을 한데 버무리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본질적인 의문을 떠올려봐야 한다. 신당 또한 사실상의 인위적 정계개편이라면 지역주의를 오히려 세분화하고 강화시키는 부작용은 없을 것인가. 신당의 내년 총선 공천이 상향식일까, 하향식일까. 상향식이라면 신당에 참여할 개혁세력들이 그동안 지역에서 새 정치를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바가 있는가. 내년 봄 선거가 임박했다며 중앙에서 집권측과 코드가 맞는 인물들을 무더기로 공천한다면 그것이 정치개혁인가.
이러한 의문점을 해소시키지 못하면 지역구도를 깬다는 신당의 명분은 결국 총선용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명분을 보완할 수 있는 길은 노 대통령이 신당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당정분리 원칙을 지키고 민주당 분당에 따른 다당제까지 마다하지 않는다면 대통령이 굳이 신당에 적(籍)을 둘 필요가 있겠는가. 벌써부터 ‘노무현당’이란 말이 나와서야 신당의 명분이 무색해질 뿐이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