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들 사이의 유머 하나. 예수나 소크라테스가 대학교수가 되었다면 절대로 테뉴어(정년보장)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는 제자를 12명밖에 두지 않았고, 소크라테스는 저서가 한 권도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구세주나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위인이 대학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요즈음의 평가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聖人들에게도 쉽지않은 제도 ▼
그들이 기댈 곳은 이제 ‘다면평가’뿐이다. 그렇다고 그 길이 순탄하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는 당시 로마에서 불온한 사상을 유포한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혔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 영혼을 썩게 한다’는 죄목으로 헴록이라는 독약을 마셔야 했다. 그들이 ‘다면평가’에서 후한 점수를 받았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만약 그들이 ‘다면평가’에서 살아남는다면, 그때는 대학이 문제다. 대학에 온통 그런 성인 현자들만 넘쳐난다면, 도대체 강의하고 점수 매기고 연구하는 소박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란 말인가.
얼마 전 윤덕홍 교육 부총리가 “예수가 부총리라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교육현안 타개의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 보도된 적이 있는데, 그렇게 높은 직책까지 가지 않더라도 요즘 웬만한 기관에선 다양한 평가제도가 정착돼 살아남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 최근 다면평가제가 시행된 공무원사회 역시 예수와 소크라테스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였을 것이다.
샐러리맨 사이에서는 한동안 이런 유머가 있었다. 세상에는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많은 월급, 좋은 상사, 예쁜 마누라. 마치 유머의 예지력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이제 샐러리맨들도 자신의 상사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요즘 방송사가 도입하기 시작한 ‘상향평가제’가 그것이다. 부하직원이 평가하고, 동료가 평가하고, 다시 오너가 평가하는 평가의 순환 고리에 직책의 높고 낮음이 무색해졌다. 이쯤에서 의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오너의 입장에서 좋은 직원은 나쁜 간부일 수도 있을 터인데, 샐러리맨은 어느 입장에서 인생설계를 해야 낙오하지 않을지 의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한쪽만 신경 쓰면 되는 일면 수직평가가 차라리 편할지 모르겠다.
상향평가와 동료평가를 포괄하는 이른바 ‘다면평가’는 무조건 위에서 아래로 평가하던 방식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발전된 형태라는 인상을 준다. 인재의 고용과 평가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경영학 쪽에서 나왔다면 일단 일리가 있는 제도일 것이다. 잘만 운영하면 숨은 인재를 발굴할 수도, 그릇되게 평가되어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구제할 수도 있는 좋은 제도다. 그러려면 ‘잘’ 운영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상사에게 밉보여’ 떨어져 나간 사람이 다른 조직에서 새로운 꿈을 펼 수 있는 반면, ‘여러모로 부적격이어서’ 밀려난 사람은 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면평가는 치밀한 평가제도인 만큼 사람들을 치밀하게 옭아맬 개연성 또한 높다.
다면평가제는 지극히 노동이 분화된 사회에서 비교적 통합적인 인간형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다. 맹점이 있다면 여전히 노동 분화된 사회의 평가제도라는 점이다. 사람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수행하는 역할은 결코 다면적이지 않다. 교수는 교수의 일을, 공무원은 공무원의 일을 충실히 잘 하면 될 뿐이다. 그들의 일면 일면이 모여서 아름다운 다면 사회가 꽃피는 것이지 모두가 다면적인 사람이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다.
▼‘걸맞은 인선-감시장치’가 대전제 ▼
소크라테스는 지식의 탐구를 위해 ‘정의(定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가령 무엇을 알고자 하면, 그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부터 내려야 한다고 했다. 사람의 사회적인 평가도 역할의 정의에서 출발하면 어긋나지 않을 듯하다. 가령 ‘국정원장은 무엇을 하는 자리인가’ ‘KBS 사장은 무엇을 하는 자리인가’라는 정의에 충실한 인선을 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 후에는 그들의 역할 수행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장치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국회와 언론이 필요하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