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윤봉길 의사 폭탄 의거 직후 중국 상하이에서 찍은 가족사진. 앉아있는 이가 곽낙원 여사. 왼쪽부터 백범의 맏아들 인, 백범, 둘째 아들 신. -동아일보 자료사진
동서고금 모든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는 모두 훌륭하지만, 그 중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 곽낙원(郭樂園) 여사의 일생은 한국 어머니의 표상이라 할 것이다.
곽 여사는 1860년 황해도 장연의 평범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14세에 해주 텃골(基洞)의 24세 농촌 청년 김순영(金淳永)에게 시집갔다. 곽 여사는 17세에 1주일 진통을 겪은 뒤 외아들 백범 김구(白凡 金九)를 낳았다. 어린 어머니의 젖이 부족해 신랑은 아들을 품고 다니며 동네 산모의 젖을 얻어 먹이며 길렀다.
극빈한 형편 때문에 곽 여사는 남편과 함께 낮에는 품삯 농사일, 밤에는 품삯 바느질로 쉼 없이 일해 아들을 서당에 보냈다. 아들은 언제나 공부가 출중하여 항상 1등을 했다.
그러던 그에게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다. 남편이 뇌일혈로 쓰러져 전신불수가 된 것이다. 가산을 팔고 인근의 의원들을 모셔다가 백방으로 치료한 결과 차도가 있었다. 반신불수가 됐지만 반쪽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 우선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단념하지 않았다. 집과 가마솥까지 다 팔아 노자를 허리에 싸매고, 지팡이에 기대어 절뚝거리는 남편을 부축하여 채찍질하면서 그를 완전 회복시키고자 전국의 명의를 찾아 문전걸식하며 먼 유랑의 길에 나섰다.
◀1924년 2월13일 중국 상하이 최준례 여사(백범 부인)의 묘비에서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백범의 둘째아들 신, 백범, 곽낙원 여사, 맏아들 인. 묘비석에 ‘ㄹㄴㄴㄴ’해라고 적은 것은 한글학자 김두봉이 단기 4222년을 한글 자음에 대입해 풀어쓴 것. 이 사진은 1924년 2월 18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소년 백범은 친척들 집에 돌려가며 맡겨졌다. 친척집에서 나뭇짐을 지던 소년 백범은 동네 서당 근처에 오면 몰래 서당 담장 밑에 숨어서 동네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서당공부가 미칠 듯이 하고 싶고 부모님이 그리워 몰래 숨죽여 울었다고 ‘백범일지’에 기록돼 있다. 몇 해 뒤, 아버지는 옛날의 건강한 모습으로 소년 백범을 만났다.
18세로 성장한 아들 백범은 1894년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더니 의병대에 들어갔다. 귀향길에는 안악군 치하포에서 한국인으로 변장하여 간첩활동을 하고 있던 일본군 육군중위를 처단하고는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 왜놈을 텃골 김구가 처단했다’는 요지의 방을 붙이고 귀가했다.
아들이 체포돼 인천감리서로 이송되자, 곽 여사는 아들이 만일 사형당하면 미래가 없는 이 세상을 함께 하직하자고 남편과 약속한 후 아들을 따라나섰다.
곽 여사는 인천항 물상객주 집을 찾아가 바느질과 밥 짓는 일을 해주며 그 대가로 감옥에 매일 사식을 넣고 아들을 멀리서 정성껏 돌보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을 애국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어머니는 감옥 안의 사형수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인천에서 씩씩한 어머니 투사가 됐다.
광무황제가 아들의 사형집행 정지를 명령하고 사면을 추진했으나 주한 일본공사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이에 청년 백범은 탈옥하여 승려가 되었다. 백범이 1901년 부모님을 뵈러 고향집에 들렀을 때 중병에 걸린 아버님의 임종을 보게 되었다.
백범은 환속해 황해도 일대에서 맹렬한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하며 1904년 신여성 최준례를 아내로 맞았다. 신민회 황해도 총감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해 만주에 무관학교 설립 활동을 하다 1910년 일제에 다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곽 여사는 또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러 서울에 올라가 아들을 면회하게 되자, “얘야! 나는 네가 경기감사를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하며 아들을 격려했다.
아들은 출옥하여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서 임시정부 경무국장이 됐다. 1922년 아들이 불러 며느리와 손자(인·仁)를 먼저 보내고 뒤이어 상하이로 갔다. 아들은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되어 독립운동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이 가족은 처음으로 1년간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둘째손자(신·信)도 태어났다.
그러나 다시 불행이 찾아왔다. 해산한 며느리가 폐렴으로 타계한 것이다. 곽 여사는 어머니를 모르는 갓 태어난 둘째손자를 암죽과 빈 젖을 물리며 길렀다. 고통스러운 것은 그 후 임시정부의 가난이었다. 모든 임정요인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를 보다 못한 곽 여사는 어두워지면 채소시장의 쓰레기더미를 찾아가 배추 겉대들을 골라 모아다가 씻고 절인 뒤 죽을 끓여 아들과 임정요인들을 부양했다.
곽 여사는 극빈 속에서 둘째손자를 영양실조로 잃을까 우려한 나머지 친척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귀국했다.
아들 백범은 인천까지의 뱃삯을 겨우 마련해 드리면서, 인천에서는 고향의 부호친구에게 전화해 마중 나오면 따라가고 나오지 않으면 이모댁을 찾아가시라고 했다. 곽 여사는 인천에 내려 아들 친구에게 전화했으나 일제가 무서워 나오지 않았다. 곽 여사는 망설이다가 이모집으로 가지 않고 대담하게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찾아갔더니 서울 갈 차표와 여비를 주었다. 서울에서 다시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갔더니 황해도 고향까지의 여비와 차표를 주었다.
곽 여사는 이제는 큰손자가 걱정되어 그도 고향에 보내도록 아들에게 엄명하였다. 고향에서 두 손자를 모두 건강하게 길렀으나 이제는 밤낮으로 아들을 만나 함께 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탈출을 꿈꾸고 있을 때 아들로부터 두 손자를 데리고 중국에 오시라는 비밀 연락이 왔다. 곽 여사는 아들이 시키는 대로 일본경찰의 감시를 따돌리고 두 손자를 이끌고 고향을 탈출해 중국에 망명했다. 곽 여사가 멀고먼 길을 돌고 돌아 난징(南京)에 도착하니 그곳 한인청년단이 곽 여사의 생신잔치를 준비했다. 이를 눈치 챈 곽 여사는 돈을 주면 자신이 음식을 차리겠다고 해서 받고는 자신의 노잣돈까지 합해 청년단에 주면서 “총을 사서 왜놈들과 싸우라”고 했다.
곽 여사는 자싱(嘉興)에서 9년 만에 그리던 아들 백범을 만났다. 아들은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내고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를 일으킨 뒤 일제가 60만엔의 큰 현상금을 걸고 혈안이 되어 추적하자 임시정부를 이끌고 중국 남방도시 각지를 전전하던 중이었다.
곽 여사는 아들과 떨어져 광시(廣西)성 류저우(柳州)에 머물 때 풍토병인 ‘인후증’에 걸렸다. 백범이 소식을 듣고 달려 가보니 중태였다. 곽 여사도 회생치 못할 것을 각오한 듯 아들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꼭 나라를 찾아라. 독립에 성공해서 귀국할 때는 내 유골과 인이 어미(며느리)의 유골까지 갖고 돌아가 고국에 묻어라.”
위대한 아들을 낳아 기른 위대한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1939년 4월 26일 이렇게 운명하여 이국땅 충칭에 묻혔다가 광복 후 고국으로 모셔졌다.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