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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지오그래픽]고창 청보리밭

입력 | 2003-05-07 18:11:00

봄바람 건듯 부니 보리밭에 초록 파도가 인다. 그 바람결에 실려 온 청 보리의 풋풋한 내음. 코끝 간질이나 했더니 결국에는 아련한 옛 추억에 잠기게 한다. 고창 학원농장의 청 보리 밭은 5월 말까지 초록빛 세상을 이룬다. 고창=조성하기자 summer@donga.com



5월 신록(新綠)의 청초함. 어디 되바라진 한여름 진록(眞綠)과 비교할까. 봄볕 아래 산색 곱던 며칠 전 황토밭에 청보리가 푸른 바다를 이뤘다는 전북 고창군을 찾았다. 여린 초록 청보릿대가 통째로 마을 하나를 뒤덮은 곳. 보리밭에서는 바람결에 초록 파도가 일고 있었다.

발도 들이밀 틈 없이 비탈 밭을 빽빽이 메운 청보리. 엄동설한에 싹 틔운 뒤 봄볕 아래서 훌쩍 자란 보리는 6월 황금빛으로 변하기에 앞서 초록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건듯 분 바람결에 청보리의 풋풋한 풀내음이 실려 온다. 세련 우아 고상 화려가 미덕인 요즘 세상과는 거리가 먼 내음. 그래도 사람들은 이 냄새, 이 빛깔에 울컥 감동한다. 최첨단 기술로도 만들 수 없는 ‘자연’은 그래서 위대하다.

공음면 선동리의 학원(鶴苑)농장. 느릿한 금이 서두름 없이 이어진 낮은 구릉의 위아래가 온통 보리밭이다. 청보리의 초록빛, 그 옆 인삼밭 그늘 막의 검은빛. 두 색은 찬란한 봄빛 아래서 충돌한다. 한 서양 미술작가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는 ‘설치예술 작품’, 바로 그 풍경이다.

청보리밭. 그저 바라다보기만 해도 가슴 뿌듯한 이 땅의 이 풍경. 인공이란 전혀 느낄 수 없는 자연의 빛깔 그대로인 덕분일 터. 그 느낌, 골프장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보리밭에 깃든 사연까지 알게 되면 감동은 깊이를 더한다. 보리밭 가꾼 이의 소박한 꿈 덕이다.

밭주인 진영호씨(53)가 낡은 갤로퍼를 타고 보리밭에 나타났다. 흙 묻은 바지에 잠바 차림. 10년 전 유수 대기업의 ‘잘나가는’ 이사 티는 간곳없다. 넉넉한 웃음, 선한 눈빛이 고창의 펑퍼짐한 황토 땅 그대로다.

“농사가 꿈이었지요. 그래서 농대(서울대)에 갔고, 졸업 후 한 2년 농사를 지었어요. 그런데 생활이 안 됩디다. 그래, 서울에서 취직했는데 이사 승진 후 1년여 만(92년)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귀농이지요. 이 땅요? 유산인데 황무지였어요. 보리밭을 가꿔 놓으니 사람들이 찾아오더군요. 그분들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보람을 느꼈습니다.”

보리밭 한가운데에는 민박집(2층 건물)이 있고 옆에는 잔디 고운 축구장(대여용)도 있다. 초대형 비닐하우스는 활짝 핀 카네이션으로 가득 찼다. 이곳은 그의 고향이고, 그는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아들. 현재 부인과 함께 농장을 일구고 있다.

모양성의 동문인 등양루와 성벽.

고창읍성(모양성) 가는 길. 도중에 고인돌 유적지에 들렀다.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정할 만큼 귀중한 인류 유산인 고인돌. 그 고인돌이 고창에만 무려 2000여 기가 있다. 이어 모양성을 찾는다. 해미읍성(충남 서산시), 낙안읍성(전남 순천시)을 본 사람이어야 그 진가를 확실히 안다. 비교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원형이 보존된 읍성이기 때문이다.

성벽(길이 1684m) 위. 읍내와 멀리 보이는 산하가 훤하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수백년 전후의 두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 모양성은 산책코스로 그만이다. 완벽하게 옛 모습을 간직한 성안은 어느 고궁보다 아름답다. 성벽은 걸어서 한 바퀴 돌기에 제격이다. 윤달이면 한복 차림의 부녀자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줄지어 성벽을 도는 ‘답성놀이’를 한다.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한다는 전설도 있다.

뉘엿뉘엿 기운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일 즈음. 선운산 선운사의 도솔암을 찾았다. 저녁 예불(오후 6시 반) 때면 선암사와 도솔암 계곡은 목탁과 독경 소리로 가득하다. 암자 옆 절벽에 각인된 거대한 마애불은 언제 보아도 신비롭다. 지그시 감은 눈으로 말하는 불법의 진리를 범부가 깨닫기는 역부족일 터. 그래도 돌부처 뵌 순간 지고지순의 본성으로 되돌아가게 되니 그 법력 대단하다.

연기식당의 풍천장어구이. 백김치와 복분자술이 별미다.

복분자술과 풍천장어, 그리고 선운사.

판소리 모양성 보리밭 고인돌 등등…, 명물 허다한 고창이건만 그래도 이 셋은 고창 여행길에 빠뜨릴 수 없는 ‘전공 필수’다. 게다가 한곳에 모여 있으니 그 연(緣)의 깊이는 헤아리기 어렵다.

농익은 산딸기 한 움큼을 손에 쥐고 힘주어 짤 때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는 색향 짙은 과즙처럼 새콤달콤 향긋 상큼한 진자주 빛깔 복분자술, 물 밖에 내놓으니 하늘로 날 듯 땅을 파낼 듯 거세게 퍼덕대는 힘 좋은 풍천장어의 담백 고소 톡톡 쫄깃한 양념구이. 복분자 한 잔 술에 생강 채 얹은 장어 한 점. 천상의 묘미요, 희대의 열락이다. 게다가 그런 별미가 산이면 산, 암자면 암자, 절이면 절 그 어디서도 뒤지지 않는 명산 가운데 고찰 선운사 곁에 있으니 고창 여행길에 이런 주안상은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선운사 입구 삼거리(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인천강 물가로 장어구이 집이 줄을 잇는다. ‘풍천’은 이 강에서도 조석으로 바닷물 들락거리는 이곳의 물이름. 민물과 바다 양수겸장으로 오가는 장어가 여기서 잡혔고 그래서 장어에 ‘풍천’이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식당은 수십 곳. 그중 28년째 한 자리를 지켜온 곳이 있다. 간판은 ‘연기식당’(주인 이상균·www.yeonki.co.kr). 그러나 ‘등나무집’이라고 해야 아는 이도 많다. 1975년, 풍천서 잡힌 장어를 등나무 아래서 굽기 시작했던 연기마을 풍천장어의 역사가 밴 이름이다.

자연산이 귀한 요즘은 ‘노지장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양식한 장어를 여기서 30분쯤 거리인 장호 개펄의 가두리에서 6, 7개월쯤 키워 낸 ‘양식 반, 자연 반’의 ‘브랜드 장어’다. 가격은 구이 1인분(375㎏)에 2만5000원. 양식(1만4000원)에 비해 비싼 만큼 맛도 좋다. 직접 담가 손님상에 내는 복분자술은 한 주전자(소주잔으로 6잔 들이)에 1만원. 연중무휴 오전 9시∼오후 9시. 063-562-1537

고창=조성하기자 summer@donga.com

제1코스에 보존된 남방식 고인돌.

●고인돌 유적

현재 지구상의 고인돌(지석묘)은 6만기. 그중 절반인 3만기가 우리나라에 있다. ‘고인돌 왕국’인 셈.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 대개는 서해와 남해의 바닷가고 그중에서도 특히 전라·황해도에 밀집한다.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다. 고인돌이 등장한 것은 청동기시대(기원전 1200년). 모양에 따라 탁자식(북방식) 바둑판식(남방식) 개석식으로 나뉘는데 전북고창군에는 두루 분포해 ‘고인돌 박물관’으로 손색이 없다.

인천 강화군, 전남 화순군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된 고창군의 고인돌은 총 447기. 주로 매산마을(죽림 도산리 일대) 주변이다. 고인돌 유적지 탐방코스(6개)를 따라 가보자.출발은 고창읍내. 이정표를 따라 가면 제1코스(주차장 없음)에 이른다. 길가에 차를 세워 두고 언덕 위 소나무 숲으로 계단을 따라 오른다. 바둑판식 등 53기가 여기저기 놓여 있다.도로를 따라 조금 더 가면 제3코스(주차장 설치). 너른 구릉에 10∼30t 규모의 고인돌 수 십 기가 놓여 있는 야외공원 형태. 여섯 코스 가운데 가장 넓어 고인돌 안내소도 여기에 있다. 근방의 제5코스는 보존상태 최고, 고인돌 최다의 유적지. 제4코스는 고인돌의 상석(올려두는 돌)을 캔 채굴유적지다.

신재효 생가의 사랑방.

●판소리의 고장

고창은 전래 판소리 여섯 마당의 사설을 집대성한 이론가 동리 신재효(1812∼1884)가 태어난 판소리 고장. 그 진면목을 보자면 모양성 앞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가야 한다. 동리의 생가를 복원해 둔 이곳은 고창판소리박물관과 공연 및 전수공간인 동리국악당도 함께 있는 ‘판소리 콤플렉스(복합 공간)’다.

▽신재효 생가=’고창읍내 홍문거리 투춘나무 무지기안 시내 우에 정자 짓고 정자 겨테 포도시렁 포도 끝에 연못이라….’ 생가 앞에 석판에 쓰인 이 판소리 사설은 동리가 직접 쓴 ‘자서가’의 한 대목. 사랑방에는 동리가 어린 소리꾼을 모아두고 판소리를 가르치는 장면을 마네킹으로 재현해 두었다. 무료.

▽판소리 박물관(www.pansorimuseum.com)=판소리 여섯 마당의 눈 대목을 들려주는 발림마당, 독공의 상징적 공간인 소리 굴, 자신의 목소리를 실험해 보는 음량분석기 등 다양한 판소리 체험공간이 마련돼 있다. 오전 9시∼오후 6시 개장. 어른 800원, 청소년 500원. 어린이 및 65세 이상 무료. 063-560-2761

▽동리국악당(www.pansorimuseum.com)=판소리 전승의 맥을 잇고 고창지역 전통음악을 보존하기 위한 전수 및 공연시설. 상설국악교실에서는 판소리 가야금 농악 대금을 가르친다. 063-564-6949

●여행정보

▽찾아가기(학원농장 청 보리 밭) △대중교통(고속버스)=강남터미널(호남선)∼고창(290㎞·4시간). 고창읍내에 군내버스로 무장에 가서 택시이용(6000원) 서 공음 행 군내버스 이용, 계동에서 하차. 고창시외버스터미널 063-563-3388 △손수운전=①서해안고속도로∼고창IC∼796번 지방도(무장 방향)∼무장읍. 읍내 육거리에서 공음방향 796번 지방도를 따라 4㎞를 가면 버스승강장(계동)에 ‘鶴苑農場’이라고 쓴 바위 이정표가 있다. 여기서 좌회전해 좁은 길로 1㎞ 쯤 들어가면 보리밭이 보이고 언덕 위에 농장 본관이 있다. ②호남고속도로∼정읍IC∼고창읍내.

▽학원농장 △홈페이지 ①http://soback.kornet.net/∼hakwon/frame.html ②http://hakwon.farmkr.net △전화 063-564-9897

▽고창군청=홈페이지 www.gochang.go.kr

● 패키지 투어

11, 17, 18일 청 보리의 빛깔이 가장 좋을 때 학원농장과 주변의 청보리 밭을 찾는 당일 패키지가 있다. 고인돌 유적지 모양성 신재효 생가도 찾는다. 학원농장의 온실에서 핀 싱싱한 카네이션도 살 수 있다. 3만8000원. 승우여행사(www.swtour.co.kr) 02-720-8311

고창=조성하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