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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입력 | 2003-05-08 18:08:00


猛虎出林(4)

그날 대군을 몰고 오중을 떠난 항량은 강수(江水=長江)가에 이르러 행군을 멈추게 했다. 거기서 강동에서의 마지막 하룻밤을 쉬면서 강 건너 동양(東陽)현의 움직임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미리 살피러 보냈던 군사가 돌아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동양현에 변고가 있어 이미 진나라의 다스림이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고을 젊은이들이 그 현령을 죽이고, 진영(陳영)이란 사람을 우두머리로 삼았다고 합니다.”

“진영은 어떤 사람이며 그 세력은 얼마나 된다더냐?”

“진영은 원래 동양현의 영사(令史=현의 관리·獄吏로 보기도 한다)로서 그곳 토박이였는데, 평소에 신의가 있고 몸가짐이 신중하여 장자(長者=어질고 덕이 높은 어른)로 불렸다고 합니다. 진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신 이래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동양현에서도 젊은이 수천 명이 들고일어나 현령을 죽이고 자기들을 이끌어줄 사람을 찾다가 진영에게로 몰려갔습니다. 진영은 처음 사양하였으나 젊은이들이 물러나지 않고 떼를 쓰니 마지못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평소 진영을 따르던 사람들이 성안으로 몰려들어 잠깐 동안에 큰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창두군(蒼頭軍)이라 하여 푸른 수건을 써서 다른 군사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는데, 지금은 그 머릿수가 2만을 넘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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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항량은 난감한 기분이었다. 진영의 군사는 머릿수만으로는 자신이 이끄는 세력과 비슷했지만 그쪽은 편안히 앉아서 지킨다는 이점이 있었다. 만약 그들과 싸워야 한다면 자기들처럼 먼 길을 가서 공격을 해야 하는 군사들로는 4만으로도 이겨내기 어려웠다. 거기다가 앞에는 장강까지 가로막혀 있지 않은가.

(힘만으로 억누르기는 어려운 상대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스스로 들고일어나 진나라 관리를 죽이고 세운 현령이라 하니 먼저 말로 한번 달래 볼 만하다. 사자를 진영에게 보내 함께 서쪽으로 쳐들어가자고 해보자.)

그렇게 마음을 정한 항량은 먼저 말 잘하는 군사를 뽑아 사자로 삼고 그에게 간곡한 글을 주어 동양현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전란의 시대가 만들어낸 특이한 개성이 항량과 항우가 이끄는 세력의 서진(西進)을 도왔다. 진영의 사람됨이 바로 그랬다.

진나라가 보낸 현령을 죽이고 진영을 그 자리에 앉힌 동양현의 젊은이들은 모여든 군사가 2만에 이르자 생각이 달라졌다. 저희끼리 의논을 맞춘 뒤에 진영을 찾아가 말했다.

“우리 동양이 비록 큰 성은 아니나 모인 창두군이 2만이나 됩니다, 게다가 저들은 또 저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겠다고 다짐하고 있으니 한번 큰일을 도모해 볼 만합니다. 현령께서 왕위에 올라 저희들을 이끌고 천하를 다투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들이오? 나는 고을의 하찮은 벼슬아치로서 여러분의 분부를 어기지 못해 현령 노릇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분수에 넘치는 일이외다. 그런데 왕이 되어 천하를 다투라니 말만 들어도 진땀이 솟는구려.”

진영이 놀라 그렇게 사양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진왕(陳王=진승)도 양성(陽城)의 한 농군에서 몸을 일으켜 장초(張楚)의 대왕이 되었습니다. 또 지금 옛 육국(六國) 땅에는 그 왕손(王孫)이 아니면서도 왕 노릇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게 중에는 공(公=현령)보다 더 하찮은 출신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의 부름을 받고 몸을 일으킨 이들이거나 재주와 덕으로 사람들의 우러름을 산 영걸(英傑)들이오. 어찌 나 같은 것과 견줄 수 있겠소?”

진영이 다시 그렇게 사양했으나 젊은이들은 물러날 줄 몰랐다. 아무리 손을 내저어도 거듭 졸라대자 구차한 핑계를 대고 그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여러분의 간곡한 뜻은 알겠으나 이는 지난번에 현령 자리를 맡은 것과는 다르오. 또 내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니 이같이 큰일을 함부로 정할 수도 없소. 돌아가 어머님께 아뢴 뒤에 그 분부대로 따르겠소.”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 정말로 그 어머니에게 물었다.

“전에 나를 현령으로 올려 세운 고을 젊은이들이 다시 몰려와 이제는 저에게 왕이 되라고 조릅니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진나라와 크게 싸워 천하를 다투어 보자는 것입니다. 어머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아직 유가(儒家)의 가르침이 세상을 뒤덮기 전이었던 만큼 타고난 효성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흔을 넘긴 진영의 어머니는 흰 머리칼을 쓸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내가 너희 집안에 시집온 이래 너희 조상 중에 귀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네가 공경(公卿)이나 대부(大夫)도 아니고 바로 왕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은 결코 상서로운 일이 못된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 그 밑에 있는 것이 낫다. 그리하면 일이 잘 되면 후(侯)에 봉해질 수 있고, 일을 그르쳐도 쉽게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이 잘 되었을 때는 네가 세운 왕이 너를 기억해줄 것이고, 일을 잘못 되었을 때는 그 왕의 이름이 네 이름을 가려 세상 사람들이 너를 지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영에게는 눈앞이 훤히 밝아오는 듯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왕 노릇을 떠넘길 사람만 찾고 있는데, 동양현의 군관(軍官) 하나가 진영의 집으로 급하게 말을 몰아왔다.

“어서 관아로 가보셔야겠습니다. 회계(會稽) 군수 은통을 죽이고 스스로 군수 자리에 오른 항량이란 자가 오중(吳中)에서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오다가 장강 저편에 머물면서 사자를 보내 글을 전해 왔습니다.”

그 말에 놀란 진영이 관아로 돌아가 항량이 보낸 사자를 만나보니, 사자는 잘 닦은 글 한 통을 내밀었다. 진영이 뜯어보니 대강 이랬다.

어찌 보면 오만한 위협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으나 소심한 진영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간절히 자신과 군민을 맡길만한 우두머리감을 찾던 차에 그 글을 보니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곧 군관과 현리(縣吏)들을 불러 모아 항량의 글을 읽어보게 한 뒤에 말했다.

“여기 쓰인 대로 항씨(項氏)는 대대로 장수의 집안이었으며 초나라에서 널리 알려진 가문이오. 그러니 지금 큰일을 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소. 우리 또한 그러하니, 항씨 같은 명문대족(名門大族)에 의지하면 틀림없이 포악한 진나라를 쳐 없앨 수 있을 것이오. 차라리 동양현의 군사를 이끌고 그 밑으로 들어가 우리 의기(義氣)를 펼쳐보도록 합시다!”

왕으로 섬기려 해도 마다하던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모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영은 그들이 따라주자 투덜거리는 젊은이들을 달래는 한편 항량에게 글을 보내 그를 맞아들였다.

아무 어려움 없이 강수를 건넌 항량이 동양현에 이르자 진영이 군사 2만을 이끌고 나와 그 밑에 들기를 청했다. 거기서 다시 세력을 배로 부풀린 항량은 그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밀고 나갔다. 그런데 항량의 군사들이 북쪽으로 길을 잡아 막 회수(淮水)를 건넜을 때였다. 앞서 살피러 보냈던 군사 하나가 돌아와 알렸다.

“해하(垓下)로 가는 길목에 대군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한 용맹한 장수가 거느리는데, 군사들의 파수가 얼마나 촘촘한지 더는 가까이 가서 자세한 걸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처음 오중을 나설 때의 항량 같으면 긴장하여 군사를 멈추고 기다리면서 어떻게든 자세하게 알아낸 뒤에 다시 군사를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동양현을 흡수함으로써 세력이 두 배로 자라 기세가 한창 올라 있을 때였다. 장졸들에게 한번쯤 어려운 싸움 맛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기분으로 대군을 밀고 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살피러 나온 적병들이 하나둘 어른거리더니 곧 한 무리의 군사가 길을 막았다. 숲과 계곡을 등지고 있는 데다 군사들도 여기 저기 흩어져 뭉쳐 있는 게 멀리서 보기에도 규모 있고 체계를 갖춘 대군은 아니었다. 다가가 보니 깃발과 의장도 진나라의 것이 아니었다. 짐작으로는 기세를 타면 한줄기 거센 물결처럼 짓쳐들었다가 몰리게 되면 흩어져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유민군(流民軍)에 틀림없었다.

(진나라 군사가 아니라면 굳이 싸울 것은 없다. 먼저 저들의 우두머리를 불러내 달래보고 정히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 가서도 짓밟아버려도 늦지 않다.)

속으로 그렇게 헤아린 항량은 군사를 멈추게 한 뒤 장수들을 좌우로 거느리고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맞은편에서도 한 장수가 말 타고 갑옷 걸친 졸개 몇을 거느리고 천천히 말을 몰아 나왔다. 백마 위에 높이 낮았는데 투구에 덮인 얼굴이 이상하게 얼룩져 있었다.

“장군의 뉘시오? 그리고 어인 일로 우리 군사의 길을 막으시오?”

상대편 장수가 말을 멈추는 것을 보고 항량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그러자 무쇠 솥바닥을 놋쇠 주걱으로 긁어대는 듯한 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육(六)땅에서 난 영포(英布)라 하오. 지금 장함이 여신(呂臣=진승이 싸움에 지고 죽자 창두군을 조직해 진나라 군사를 진현에서 내쫓고 진승을 장례지내 준 사람)을 쳐부순 뒤 진현(陳縣)에 남겨두고 간 좌우 교위(校尉)를 청파(靑波)에서 무찌르고 다시 장함을 뒤쫓아 동쪽으로 가는 중이외다. 장군께서 이끌고 계신 군사가 진군(秦軍)은 아닌 것 같아 살피고 있을 뿐, 길을 막은 적은 없소이다.”

그때 군사들 중에서 그를 알아본 자들이 있어서 소리쳤다.

“경포(경布)다! 대강(大江=장강)에서 수적(水賊)질을 하다가 파군(番君=番縣의 현령·여기서는 나중에 長沙王이 된 吳芮)의 사위가 된 그 경포다!”

경포라면 항량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