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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뉴욕타임스]환청, 귓속 저멀리 공포의 속삭임

입력 | 2003-05-11 17:35:00

정신분열병에 걸린 천재 수학자 존 내시의 삶을 그린 ‘뷰티풀 마인드’의 한 장면. 영화에서는 내시가 환시에 시달린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 그는 평생 환청과 더불어 살아야 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처음엔 허공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마치 불알친구처럼 “어이, 존” 하고 속삭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그 목소리는 ‘악마들의 음성’으로 바뀌었다. 누구는 뇌에 암세포가 번지고 있다고 하고 다른 이는 다른 사람의 뇌세포를 훔치라고 하고….

정신분열병 환자 존의 경험담이다. 결국 50여명의 목소리가 뒤섞여 확성기처럼 큰 목소리로 온종일 그를 괴롭혔다. 그 목소리들은 수시로 자살을 재촉했고 전화를 받으면 “너는 죄인, 너는 죄인”이라고 합창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무서웠어요. 그들은 늘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한 정신분열병 환자가 뇌 부위를 자기로 자극하는 ‘TMS치료’를 받고 있다. 사진제공 NYT

환청은 정신분열병의 대표적 증세. 미국에선 정신분열병 환자 280만명 중 50∼75%가 환청에 시달리고 있다. 많은 환자가 그리스 신화의 복수의 여신처럼 무자비한 환청의 고문에서 벗어나려고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지금껏 정신분열병을 치료하는 의사들은 환청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의사들은 종종 환청을 이 병의 단순한 부작용으로 치부했고 ‘미친 소리’는 연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

최근 일부 과학자들은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 환청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첨단 뇌 영상 과학의 도움을 받아 환청 때 뇌의 어느 부분에 이상이 생기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또 환자로부터 환청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를 귀담아 듣고 있다.

몇 가지 새로운 이론들이 생겼고 이에 따른 치료법도 뒤따르고 있다. 전통적 약물요법으로 호전이 되지 않는 환자에게 환청과 관련된 뇌 부위를 저주파의 자기로 자극, 환청을 잠재우는 치료법도 등장했다.

이 치료법, 즉 ‘두개간 자기 자극법’(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TMS)의 대가인 예일대의 랄프 호프만 박사는 학술지 ‘일반정신의학기록’ 최신호에 이 치료가 효과적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조사 대상자의 절반은 12주 내에 환청이 재개됐지만 어떤 환자는 1년까지 환청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환청의 고충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호프만 박사에게 치료받고 있는 한 여성 환자는 환청을 ‘끝없는 정신적 강간’이라고 말했다.

1985년 정신분열병이라고 진단받은 니콜 길버트란 37세의 여성은 끝없이 이어지는 환청 때문에 신문도 책도 읽지 못했다.

“그들은 저보고 ‘당신은 예수’라고 속삭여요. 그 다음에는 ‘허허 농담이었어, 너는 바보구나, 어떻게 그것을 믿니’ 하고 놀렸죠.”

양전자단층촬영(PET)이나 기능 자기공명영상(f-MRI) 촬영 등 뇌 영상기술은 환청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환자가 환청을 느낄 때에는 청각, 말, 기억 등과 관련된 뇌 부분에서 혈액이 잘 흐르는데 이는 이 부분에 있는 신경세포의 활동이 왕성해짐을 뜻한다.

코넬대의 데이비드 실버스웨이그 교수는 “환청으로 고생하는 환자를 미치광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뇌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실제처럼 듣고 당신에게 말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연구들은 몇 가지 갈래로 나눠진다.

호프만 박사팀과 런던 정신연구소 필립 맥과이어 박사는 환청 때에는 평소 말하는 과정을 담당하는 뇌 부위인 ‘브로카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실버스웨이그 교수와 데이비드 코폴로프 박사의 연구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환청 때 뇌 관자엽, 마루엽 등의 변화도 연구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뇌 영상촬영의 오류, 판독의 잘못 등 때문에 생기는데 실험 결과의 차이가 이론의 차이로 이어지고 있다.

정신분열병을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은 이 병의 환자가 뇌에서 만들어지는 신호를 잘못 이해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환자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 이해하는지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다.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 정신건강연구소의 코폴로프 박사는 “환청은 감정적 내용과 뒤섞여 인식된 정보 중에 청각과 관련된 파편들이 부적절하게 조합돼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해마와 기억과 관련된 뇌의 다른 부위가 환청 때 활성화되는 것이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맥과이어 박사는 일반인이 단지 생각하는 것을 환자들은 환청으로 듣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설에 따르면 환청은 뇌 내부에서 흘러야 할 ‘생각의 말’과 뇌 바깥으로 나와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실제 언어를 구별하는 시스템이 깨어져 생긴 것이다.

스탠포드 대의 주디스 포드 박사, 예일 대의 다니엘 마탈론 교수 등은 뇌의 청각 피질이 이런 시스템 붕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원래 ‘생각의 말’을 할 때에는 청각 피질의 활동이 약해지는데 환청이 있는 환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뇌 영상 분석을 통해 밝힌 것.

호프만 박사는 약간 다른 가설을 주장하고 있다. 뇌의 회백질(灰白質)이라는 조직이 손상돼 브로카 영역과 언어를 인식하는 ‘베르니케 영역’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베르니케 영역은 주위 부위 또는 제법 멀리 떨어진 브로카 영역에서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정신분열병 환자는 베르니에 영역이 포함된 관자엽 상부의 회백질이 결손된 상태다.

호프만 박사는 “베르니케 영역은 주위에서 보내는 정보는 덜 받아들이고 브로카 영역에서 보내는 신호는 확실하게 받아들인다”며 “이런 과정에서 베르니케 영역은 ‘생각 말’을 실제 말로 착각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호프만 박사는 치료에서 전자기 코일을 이용하고 있다. 사진과 같이 환자의 머리에 장치를 달면 코일에서 전자기파가 나온다.

오랫동안 중증 우울증 환자의 치유에 사용한 전기충격요법과 달리 TMS는 뇌에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기억 감퇴 등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다.

존은 지난해 여름 호프만 박사에게 치료를 받고나서 “환청 소리가 작아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효과도 6개월만 지속됐다”고 말했다.

존은 약을 복용하면서 환청과 싸우는 자신만의 전술을 개발했다. 환청이 자신을 비난할 때 환청과 대화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는 증세가 상당히 호전됐다.

“우선 그 소리를 내 친구로 만들고 싶어요. 언젠가 현실에서 벗어나게 되겠죠. 지금까지 오랫동안 환청이 나를 갖고 놀았지만 이제 그들이 다가온다면 내가 그들을 갖고 놀겠어요.”(www.nytimes.com/2003/05/06/health/psychology/06VOIC.html)

정리=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