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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민칼럼]반미元祖 대원군의 교훈

입력 | 2003-05-12 18:18:00


‘사진이나 찍으러 미국에 가지는 않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사진은 국민을 안도케 한다. 후보 시절 그가 반미 분위기를 배경으로 이 말을 던졌을 때 많은 국민은 앞으로 5년 동안 우리가 미국과 등지며 사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역대 대통령 누구도 기념사진이나 찍으러 미국에 간 경우는 없다. 집권 초 방미 길에 나섰던 현실적 이유는 대개 미국으로부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아 권력의 발판을 굳히려던 것이었다. 최고회의 의장 시절 서둘러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취임하자마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달려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비정상적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일수록 얼마나 간절하게 미국의 ‘승인’에 집착했는지를 보여준다.

▼국제정세 몰랐던 최고권력자 ▼

그때마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우리 국민을 실망시키면서까지 방문자를 환대했다. 집권 과정의 문제를 따지기보다는 한반도에 친미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미국에 더 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박 전 대통령은 이른바 혁명공약을 통해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미국을 위시한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고 선언해 그들의 욕구를 미리 충족시켜 주었다.

그런 박 전 대통령과 비교할 때 이번 노 대통령을 맞는 미국의 분위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후보시절부터 취임 이후 어느 시점까지, 노 대통령의 언행은 미국에 대해 분명히 비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그가 ‘우방국의 지도자’인지 ‘테러국의 동지’인지 명확한 답변을 원할 것이다. 노 대통령이 설마 후자일 리 없기 때문에 그는 ‘그동안 잘못 알려졌다’고 해명하든지 아니면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고 실토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기회에 우리사회에 몰아쳤던 반미열풍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는지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세기 중엽 해군제독 매슈 페리를 앞세운 미국의 개항압력에 굴복해 일찌감치 나라 문을 열어 시야를 세계로 넓히고 서양의 지식과 문물을 빠른 속도로 흡수했다. 그러나 같은 시대 대원군은 미국과의 전투 같지도 않은 전투에서 이긴 승리감에 취해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면서 우리나라 반미의 원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우리의 근대사가 말해주는데, 예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자가 세상 돌아가는 형국 모르고 판단력도 부족한 채 아집과 독선으로 국정을 운영할 때 나라꼴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그 후에도 미국과 싸우다 원자탄을 두 방씩이나 맞고 수십만 국민의 목숨을 빼앗겼지만 오히려 미 군정 책임자였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호감을 갖고 미국과 가장 친한 나라가 되었다. 반대로 맥아더 장군이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벌여 나라를 구해준 한국에서는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그의 동상조차 반미여파에 묻혀 잊혀지고 있다.

유일 강대국 미국의 오만까지 두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반미에는 원인과 목적이 있어야 하고 또 그 결과가 우리의 이익과 합치해야 하는데 과연 최근 1년의 상황이 그랬던가는 의문이다. 반미가 강자에 대항함으로써 약자 콤플렉스에 걸려있는 다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선동의 도구였다면 이 나라 정치 사회 수준은 대원군 시절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없다.

▼세계화시대 ‘코드’ 맞춰나가야 ▼

‘사나운 개 콧등 성할 날 없다’는 속담도 있지만 사람이든 국가든 증오와 투쟁을 일삼으면 스스로 상처를 입고 외로워질 뿐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의 측근 중 미국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재임 중 한번 다녀 올 것을 권한다. 과거 학생운동하다가 숨어 사느라 비자를 못 받아 미국에 안 갔던 사람들로 대통령이 둘러싸이는 것은 국익에 이롭지 않다.

노 대통령이 이번 방문에서 미국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올지 궁금하다. 미국을 현실적인 벽이자 교만한 패권국이라고 느낄지, 아니면 절실하게 동맹을 유지해야 할 나라라고 느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개인감정이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노 대통령이 귀국해서 할 일은 분명하다. 실질적으로 한반도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줄 미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대원군 같은 존재는 세계화 시대와 ‘코드’가 너무 안 맞기 때문이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