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여)는 지난달 6일 서울에 있는 한 아동학대예방센터에 전화를 걸어 “5년 전 이혼한 뒤 아이들을 맡고 있는 남편이 아이들 앞에서 음란 비디오를 본다고 한다”며 상담을 요청했다. 5일 뒤 이 센터는 “딸(9)이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 같아 이틀째 보호하고 있다”는 전화를 해왔다.
A씨는 즉각 딸을 만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센터 담당자는 “부양권이 없는 어머니를 만나게 할 수 없다”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A씨는 결국 1주일이 지난 후에야 겁에 질려 있는 딸을 겨우 면회할 수 있었다.
딸은 학교도 가지 못한 채 계속 예방센터의 ‘보호’를 받다 한달 만에 A씨에게 인계됐다. A씨는 “내가 부양권이 없다면, 다른 친척들에게라도 연락을 해 상처받은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무성의한 센터의 대응에 울분을 토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성폭력 또는 아동폭력 상담소들이 무책임한 태도와 전문성 부족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을 2번 울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2001년 10월 딸(4)이 성폭행 당한 사실을 모 상담소측에 상담했던 공무원 C씨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집을 방문했던 상담소 직원이 장난감 주사기를 발견하자 자신을 마약 투여 혐의로 의심하더라는 것.
C씨는 “딸의 신상보호를 위해 상담소에 문의했는데 더욱 불안감만 가중됐다”며 “차라리 공개적으로 경찰에 수사를 맡기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후회했다. 곧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C씨가 지목한 성폭행 용의자는 뒤늦은 경찰수사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일부 아동상담소들은 상담자에게 변호사 비용을 보내달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초기단계에 기본적인 성병 검사도 하지 않아 아동이 성병에 걸리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현재 전국의 성폭력상담소는 모두 111곳. 보건복지부 산하 아동학대예방센터까지 합치면 130여개에 달한다. 이들은 정부와 각 지자체로부터 1년에 5200만원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성폭행 상담뿐 아니라 아동학대와 가정폭력을 ‘백화점’식으로 함께 취급하고 있어 전문성은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성폭력 피해가족들은 지난해 여성부에 상담소의 문제점에 대해 진정서를 냈다. 상담소 관리 감독 소홀의 책임을 물어 여성부와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도 준비중이다.
송영옥(宋英玉·44·여) 아동성폭행 피해가족 모임 대표는 “현실에 맞는 상담을 하고 피해가족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는 상담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여성부는 이 같은 문제가 불거지자 13일 전국의 상담소 대표들과 긴급회의를 가질 예정이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