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4년 전부터 ‘주가가 오를지 떨어질지는 외국인에게 물어 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외국인이 주식을 사면 주가가 오르고, 외국인이 주식을 팔면 주가가 떨어지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한국 증시는 ‘외제(外製) 증시’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외국인은 누구이며, 언제부터 그리고 왜 그렇게 우리 증시에서 영향력이 큰 것일까요.》
요즘 한국 주식시장에서는 “외국인 투자자의 움직임을 알아야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정부도 외국인 투자자들을 더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을 두고 외국인 투자자라고 부르며 한국 증권시장에서 이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주식시장에서 ‘외국인’이라 함은 한국 주식을 사고팔기 위해 금융감독원에 ‘등록’한 외국인을 말합니다. 이처럼 투자자로 등록한 외국인은 3월말 현재 1만4396명입니다. 이 중 개인이 5068명이고, 기관투자가가 9328명입니다.
외국인이 한국 증시에서 직접 주식을 사고팔기 시작한 것은 1992년 1월부터였습니다. 한국에서 증권거래소가 세워진 것은 1956년 3월이니까 3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외국인에게 문을 연 것이지요. 외국인에게 증시 문을 열기 전에는 ‘코리아펀드’와 ‘코리아 유로펀드’, ‘코리아 아시아펀드’ 같은 외국인만 살 수 있는 주식형 뮤추얼펀드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한국 주식에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은 92년 증시가 개방된 때부터 한국 증시의 투자문화를 상당히 바꿔 놓았습니다. ‘저PER(주가수익비율)주 혁명’ ‘블루칩(우량주)’ ‘기업인수합병(M&A)’ 등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용어와 투자전략을 새롭게 선보이며 증시를 이끌고 있습니다.
PER란 어느 기업의 주가를 주당순이익(총순이익÷총발행주식수)으로 나눈 것을 말합니다. 주가가 이익에 비해 몇 배로 거래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이지요. 저PER주란 말 그대로 ‘PER가 낮은 주식’이며, 외국인들이 92년에 이런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주가가 급등한 것을 ‘저PER주 혁명’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제 외국인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외국인은 3월말 현재 거래소에 상장된 주식을 77조4567억원어치나 갖고 있습니다. 전체 시가총액의 35.1%나 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외국인의 주식보유비율이 30%를 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코스닥증권 시장에 등록된 주식도 3조2125억원(9.7%)어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경제와 증시를 대표하는 우량 대기업 대부분의 대주주는 외국인입니다. 국민은행(66.8%) 포스코(62.2%) 삼성전자(52.5%) 삼성화재(52.0%) 현대자동차(45.2%) KT(43.2%) SK텔레콤(40.5%) 등등…. 이처럼 업종별로 1위 종목인 기업에서 외국인 지분이 40%를 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외국인이 주식을 사면 주가가 오르고 팔면 주가가 떨어지는 ‘외국인 장세’가 된 것입니다. 외국인은 작년 2월부터 10월까지 8개월 동안 5조4385억원어치의 주식을 팔았습니다. 그 여파로 한때 940선까지 올랐던 종합주가지수는 580선까지 폭락했습니다. 반면 지난해 11월부터 올 1월까지는 순매수에 나서 종합주가지수가 720선까지 회복했지요. 그런데 2월부터 4월까지 2조681억원어치를 내다팔아 종합주가지수는 한때 510선까지 밀렸습니다.
4월초에는 크레스트증권이란 낯선 외국 투자가가 한국의 대표적 정유회사인 SK㈜ 주식을 14.99% 사들여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SK㈜의 경영권을 인수하려는 M&A는 아니라고 밝혔지만, 대주주로서 회사 경영에 이런저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분도 신문이나 TV에서 보아 알 것입니다.하지만 외국인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 투자하는 외국인이 1만4000명을 넘는 것처럼, 외국인은 천의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올해 한국 주식을 내다판 곳은 주로 전 세계 증시에 투자하는 미국의 글로벌펀드였습니다. 이들 펀드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한국의 대표기업 주식을 많이 샀는데, 미-이라크 전쟁과 북한 핵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갖고 있던 주식을 대량으로 내놓은 것이지요.
반면 아시아 지역에 투자하는 ‘지역펀드(Regional Fund)’와 신흥시장에 투자하는 ‘이머징마켓펀드(Emerging Market Fund)’는 오히려 한국 주식을 샀습니다. 또 투자규모가 1억∼3억달러 정도인 헤지펀드는 2, 3일 또는 몇 주일 단위로 주식을 사고파는 단타매매를 합니다. ‘홍콩물고기’나 ‘빅 브러더(큰형님)’라는 별명을 갖고 주가지수선물·옵션 시장에서 단기투자를 하는 외국인도 있고요.
외국인이 천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검은머리 외국인'에 대한 논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검은머리 외국인이란 외국인 명의로 한국증시에 투자하는 한국인을 가리킵니다. 아일랜드나 말레이시아 라부안처럼 세금을 내지 않는 조세회피지역에 역외펀드(Off-shore Fund)를 만들면 외국인처럼 한국주식을 사고팔 수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이 거의 없어지고 있는 세계화 시대에는 외국인이 들어와 한국 증시에 투자하고 한국인도 미국이나 러시아 등 해외에 투자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큰 물결입니다. 한국 증시가 외국인 손에 너무 좌지우지되는 ‘천수답 증시’가 됐다고 외국인을 원망하기보다, 외국인 영향력을 줄이도록 한국의 기관투자가를 육성하고 개인투자자도 성숙한 투자문화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홍찬선기자 hcs@donga.com
▼헤지펀드란 ▼
헤지펀드(hedge fund) 원래 헤지는 가격이 변하거나 인플레 등 다른 이유로 자산 가치 하락 위험을 피한다는 뜻. 사전적 의미로 헤지 펀드는 그런 목적으로 사용되는 자금이다. 하지만 이런 위험 회피 목적이 아니라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을 추구하는 단기 투기성 자금(핫머니)으로 운용되는 게 더 많다. 미국계 자금이 주류이고, 국제 금융시장이 자유로와지면서 국경을 넘나들면서 매우 공격적인 투자 성향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헤지 펀드가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다.
▼에피소드=생필품의 탄력성 ▼
2001년 10월, 배추를 거두지 않고 밭에서 갈아엎는 농가가 줄을 이었습니다. 5t 트럭 한 대 분량의 배추 가격이 90만원으로 전년(245만원)보다 63.3%나 폭락했기 때문입니다. 배추를 뽑아 팔아봤자 인건비도 안 나온다며 수확을 포기했습니다.
2002년 8월 2일, 경북 의성역 광장에는 9000여명의 농민이 모였습니다. 중국산 마늘을 대량으로 수입해 자체 생산한 마늘의 판로가 막힌 농민들이 궐기대회를 연 것입니다.
위의 두 사례는 흉년이 들어도 걱정이고 풍년이 들면 더 불안한 농민의 고달픈 현실을 보여줍니다. 풍년이 들면 배추나 마늘 값이 많이 떨어져 손해만 나고, 흉년이 들어 가격이 오르면 해외에서 수입해 가격 상승을 막습니다.
농민들을 이처럼 고달프게 만드는 것은 농산물이 대부분 생활필수품이어서 소비가 가격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추 값이 떨어졌다고 배추 먹는 양을 지금보다 2∼3배 늘리기도 어렵고, 마늘이나 고추 값이 올랐다고 양념을 하지 않아 아무 맛도 없는 김치를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가격이 변할 때 소비나 공급 양이 얼마나 변하는지를 나타내는 것을 탄력성(Elasticity)이라고 합니다. 가격변화보다 소비변화가 크면 탄력적이라고 부르고, 가격변화에 비해 공급변화가 적으면 비탄력적이라고 합니다.
탄력성을 알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울 남산에 있는 1∼3호 터널을 지날 때마다 2000원씩 통행료를 받는 것과 프로 야구장 관람석이 비어도 입장료를 내리지 않는 것도 탄력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입장료를 내리면 관람객이 늘어나지만, 탄력성이 낮아 낮아진 입장료보다는 전체 입장료가 줄어들기 때문에 입장료를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담배 값이 오를 때마다 담배를 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시 피우게 되는 것도 탄력성(가격민감도)이 점차 떨어지는 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찬선기자 hc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