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거짓말을 잘 한다. ‘토끼전’을 보라. 거북이를 따라 용궁에 갔다가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거짓말을 한 토끼를 총명하다며 대대로 숭상해온 민족이 한국인이다.” 3년 전 한국통을 자처해온 한 중국학자가 톈진(天津)의 한 신문에 이 같은 글을 쓰자 당시 한국 교민들과 조선족 학자들이 반발했던 적이 있다. 지난해 월드컵 축구대회 때 중국 언론이 집요한 한국 깎아내리기로 현지 교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것도 중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무지와 중화(中華)사상에 따른 편견 등 잠재의식의 한 단면을 드러낸 사례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오래 근무한 한국인들에게 한국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중국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답을 망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중수교 10주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중국 내 지한파(知韓派)는 아직 ‘불모(不毛)’에 가깝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지한파 현주소▼
한국 전문가로 꼽히는 중국인들은 대체로 외교부나 공산당 대외연락부의 한국 관련 업무 종사자들로 국한돼 있다.
▼연재물 목록▼
- 일본…"친목 넘어 정책교류"
- 미국…공화당 인맥 부실
학계도 동북아 전반을 다루거나 남북한을 넘나드는 인사들이 지한파로 대접받고 있다.
외교부의 한국통을 든다면 1991년 한중수교의 주역인 첸치천(錢其琛) 전 부총리와 수교회담 실무수석이었던 장루이제(張瑞杰) 전 아주국 부국장을 비롯해 북한에서도 근무했던 장팅옌(張庭延) 전 주한대사, 역시 남북한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싱하이밍(邢海明) 한국과장과 관화빙(關華兵) 주한대사관 참사관 등이 있다.
당 대외연락부에는 김일성(金日成) 전 주석의 전문통역으로 평양에서 근무했던 탄자린(譚家林) 의전국장,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한 왕슈샤(王淑霞·여) 아주국 부국장, 서울에서 한국어 연수를 한 장류청(章榴成) 한국과 부과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정계에는 중국 공산혁명 원로인 보이보(薄一波)의 아들로 다롄(大連)시장 시절 황병태(黃秉泰) 전 주중대사와 가까웠던 보시라이(薄熙來) 랴오닝(遼寧) 성장이 대표적인 지한파 인사.
학계에는 베이징(北京)대 한국학연구센터 양퉁팡(楊通方) 주임과 선딩창(沈定昌) 교수, 국제관계학과 류진즈(劉金質) 교수, 펑위중(馮玉忠) 전 랴오닝대 총장, 인민대 한다위안(韓大元) 교수, 평양 화교 출신인 외교부 산하 중국국제문제연구소 타오빙웨(陶炳蔚) 연구원, 선젠화(沈建華) 연구원 등이 있다.
▼조선족 '낮은 목소리'▼
조선족 학자로는 칭화(淸華)대 정인갑(鄭仁甲) 교수, 사회과학원 한진섭(韓鎭燮) 교수와 박건일(朴建一) 교수, 중앙민족대학 황유복(黃有福)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그나마 조선족 인사들에게 지한파로서의 역할을 기대해보지만 아쉽게도 중국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다.
장팅옌 전 대사나 양퉁팡 주임 등 정관계와 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한파 중국인의 대부분이 베이징대 조선어과 출신.
이 학과는 조선족의 입학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이들이 한국을 보는 눈은 철저히 중국의 국가이익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조선족 학자들은 지적한다.
중국은 한국의 두 번째 교역국으로 경제적 의존도가 매우 높지만 경제계 인사 중에도 지한파는 선뜻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한중수교 관련 정책보고서를 작성한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 산하 피성하오(皮聲浩) 국제연구소장과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대규모 구매사절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했던 중국국제무역촉진위원회 위샤오쑹(兪曉松) 회장 정도.
▼韓流는 지한파 육성기반▼
주중 한국문화원이 주 2회 운영하는 한국어 교실에는 초급 2개반과 중급, 고급 각 1개반에 600여명의 중국인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때문에 수업을 잠정 중단하긴 했지만 한국어 교실 수강생들은 학생, 대학교수, 한국 업체 현지직원, 주부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으며 한국인들이 많이 들르는 유흥업체 종사자들도 있다.
대부분 업무상 필요 때문이지만 중국에서 한창 유행인 한국 영화나 노래를 원어로 직접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기존의 지한파 인사와는 달리 보통 중국인들 중에 한국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는 것이다.
문화원의 한 관계자는 “지한파 네트워크는 한국의 경제력이나 문화적 흡인력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다”면서 “현재 지한파가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앞으로 늘어날 가능성은 크다”고 말했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지한파 왜 적은가▼
“한국에서 높은 사람이 올 때가 중국 고위층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폐쇄사회의 특성상 개인적 만남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주중 한국대사관에 부임한 한 외교관은 중국의 카운터파트를 만나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 끈질긴 전화요청으로 간신히 약속을 받아냈지만 중국 외교관은 같은 부서의 동료를 대동하고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외교부 규정상 1등서기관 이하는 제3국 외교관을 단독으로 만날 권한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중국 외교관들은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 면담 요청을 하면 “만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먼저 물은 뒤 상부의 허가를 받아 지정된 장소에서 만나고 그 결과를 상급자에게 보고해야 한다. 면담 과정에서도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 외에는 거의 입을 열지 않는다. 잦은 접촉으로 인간적 유대감을 키우며 한국을 이해시킨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다른 정부기관도 마찬가지다.
중국 관리들은 또 한국인과 친하다는 표를 내는 것을 꺼린다. 남북 등거리외교가 한반도 정책의 핵심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 조선족 학자는 지한파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않는 이유로 이념적 요인이 완전히 불식되지 않았다는 점과 뿌리 깊은 중화사상 및 중국 상류층의 한국유학 기피 등을 든다.
그는 “앞으로 정책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국의 고위간부 자녀나 학문적으로 유능한 사람은 미국 일본 유럽으로 유학가지 한국에 가지 않는다”며 “한국과 한국민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지한파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중간에 경제교류가 활발하다지만 중국 상인의 80% 이상이 고졸 이하 저학력의 사영기업가들이며 한국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사업 대상으로 볼 뿐”이라고 덧붙였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