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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프리즘]김상환/'반어와 익살'이 너무 넘치면

입력 | 2003-05-13 18:16:00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갖가지 반응 중 두 경우를 생각해보자. 먼저 “도대체 왜 공부죠,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반면 공부는 하는데 식구들과 함께 식사할 때도 책을 펴들고 대화를 청해도 공부를 핑계로 방으로 피하는 이상한 순응이 있을 수 있다.

▼ 모순-부조리 많다는 것의 반증 ▼

몇 주 전 재선거에서 당선된 유시민 의원이 면바지 차림으로 국회에 선서를 하러 갔다가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센세이션이 의도된 계산에 따른 것인지의 여부를 떠나 그 옷차림이 화제가 된 것은 위의 첫 번째 학생의 대답처럼 어떤 질문형 응답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문이나 명령의 전제를 되묻게 만든 것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학생은 주문이 있고 나서 응답한 것이지만 유 의원의 경우는 옷차림이 있고 나서야 그런 주문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지난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잡초 정치인’ 운운해 정가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런 표현의 의도나 전제를 묻는 응답이 홍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반면 신문 가십난에는 익살맞은 대꾸가 있었다. 대통령이 정치인들을 초대한 자리에 빈자리가 꽤 보이자 이것이 “잡초는 빠지라”는 주문에 따른 결과인 것처럼 그려놓은 것이다.

서양말 유머의 번역어에 해당하는 ‘익살’은 권위에 저항하는 어법에 속한다. 기존의 규칙을 따르는 가운데 그 규칙의 허를 찌르는 귀결을 끌어내는 어법, 과잉 순응을 통해 역효과를 가져오는 어법이 익살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업 규칙을 엄격히 지킴으로써 오히려 혼란을 초래하는 준법파업도 익살의 한 종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반어’는 서양말 아이러니의 번역어로, 기존의 규칙이나 전제를 직접 문제 삼는 어법이다. 문답법을 통해 동시대인들의 통념들이 근거 없는 억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 소크라테스는 반어의 천재였다.

하지만 반어가 지나치면 회의주의에, 익살이 지나치면 삭막한 상대주의에 빠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통상의 어법보다는 반어와 익살로 넘치기 시작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반어와 익살이 없는 사회, 그런 사회는 분명 변화의 활력을 잃어버린 사회, 웃음과 상상이 고갈된 불행한 사회다. 하지만 웃음은 냉소로, 상상은 잔머리로, 변화의 활력은 분열과 대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이런 경우 반어와 익살은 공격적 질문의 하위 형식으로 전락한다. 요즘의 우리 사회가 그런 상황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걱정이다.

주요 일간지들의 사설 제목이 종종 ‘…라니’ 식의 질문형인 것을 보면서 이런 어투가 사회 곳곳에서 만연하고 있는 갈등과 공격적 심성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어떤 영역보다 지독한 반어와 익살의 지옥은 교육 분야일 것이다. 지난번 교육부 장관이 강남의 학부모들과 면담할 때 오고갔던 대화들을 생각해 보라. 자식들을 과외 보내지 말라 하니까 어떤 어머니는 담임교사가 학원에 보내라 했다 하고, 어떤 어머니는 책을 많이 읽게 하니까 성적이 너무 떨어져서 크게 후회했다고 해서 장관이 당황했다. 며칠 전 서울대는 몇몇 경시대회를 포기한다고 했는데, 그 대회가 과외시장의 과열 요인이란 것이 이유였다.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학교가 참교육의 현장으로 탈바꿈되기는커녕 예상치 못한 잔머리와 부작용에 부딪히는 것이 현실이다.

▼ ‘대화형 어법 찾기’ 노력을 ▼

반어와 익살의 어법이 넘친다는 것, 나아가 현실 자체가 반어적이고 익살스럽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가령 우리 사회에 그만큼 모순과 부조리가 많다는 것을, 기존 권위의 무게와 정당성이 의심받고 있다는 것을, 변화의 요구가 크다는 것을, 따라서 현재가 어떤 이행의 시기임을 의미한다. 이 이행기의 혼란이 해소되어 우리 사회가 안정기로 접어들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반어와 익살의 어법만으로는 이 반어와 익살의 현실을 돌파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화형의 어법을 찾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