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훈 전 총리의 사람 보는 법의 핵심은 원칙과 직분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있다. 상관 개인보다 원칙에 충성하는 사람이 결국 상관에게도 도움이 되더라는 것. -동아일보 자료사진
1982년 초 어느 날. 강영훈(姜英勳) 당시 주(駐)영국 대사는 선준영(宣晙英) 주 브라질 공사가 본부로 소환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직속상관인 현지 대사와 의견이 맞지 않아 대사와 공사 두 사람 모두 외무부에서 쫓겨나게 됐다는 얘기였다. 강 전 총리는 즉시 노신영(盧信永) 안기부장에게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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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공사가 원칙에 어긋나게 상급자에게 대들었을 리가 절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내보내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입니다.”
강 전 총리가 확신에 찬 구명 편지를 쓴 것은 선 공사가 브라질 근무 직전 주영 대사관의 정무참사관으로 있을 때 함께 일해 본 경험 때문이었다. 강 전 총리의 회고.
“매일 아침 회의를 하는데 선 참사관은 상관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제 소관이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며 조목조목 자기 의견을 냅니다. 상급자의 말에 그렇게 반대 의견을 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 반대가 모두 일리 있는 얘기였어요.”
강 전 총리의 편지에 힘입어 선 공사는 계속 근무할 수 있었고, 이후 주제네바대표부 대사, 외교통상부 차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쳐 현재 주유엔 대사로 활약하고 있다.
원칙을 중시하면서 상관에 아첨하지 않고 당당하게 일하느냐 여부는 강 전 총리가 ‘인재’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물론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곧 상급자와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강 전 총리는 1949년 육군본부 시절 부하였던 유근창(柳根昌) 보임과장의 예를 들었다.
“인사국장으로 부임해보니 인사 시스템이 주로 일본식으로 돼 있었어요. 영관급 이상은 인사국이, 위관급 인사는 고급부관실이 담당하는 식이었죠. 이를 미국식으로 인사국은 인사정책을, 고급부관실은 그 운용을 담당하도록 바꾸려니까 인사국 부하들이 모두 반대하는데 유 과장만 개편안을 지지하는 거예요.”
강 전 총리의 방안대로 할 경우 인사국은 실질적 권한을 다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 부하들의 반대 이유였다. 그러나 유 과장만은 “국장님 의견이 원칙에 맞습니다”고 지지해줬다.
이후 강 전 총리가 주미대사관의 육군무관 파견근무를 마치고 53년 인사국장으로 복귀해보니 인사국은 다시 일본식으로 환원돼 있었다. 유 과장은 “과거로의 회귀 움직임에 반대했으나 중과부적이라 막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강 전 총리는 다시 인사정책과 운용을 분리하는 개혁안을 관철시켰다.
이런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서로 존경하는 선후배로 가깝게 지내고 있다. 유 과장은 중장까지 진급한 뒤 국가보훈처장을 지냈고 현재 유관순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다.
강 전 총리는 “원칙대로 사는 일이 쉽지 않은 세상에서 조직의 압도적 의견에 맞서 반대의사를 내는 것은 상급자에게 대드는 것만큼이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공무사(大公無私·공적인 일에 사익을 앞세우지 않음)’의 정신으로 상하귀천(上下貴賤)을 막론하고 법치의 원칙을 철저히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조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강 전 총리는 특히 “상관 개인보다는 원칙에 충성하는 사람이 결국 상관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강조했다.
물론 강 전 총리는 원칙과 직분을 지키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출세’하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인식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의 총리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이진(李進) 전 환경처 차관을 예로 들었다.
“공화당, 민정당의 당료와 국회의원을 거친 이 전 차관은 정치를 모르는 나를 보필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지도’하겠다는 자세를 보인 적이 한번도 없어요. 오직 나를 돕는 것이 정부를 돕는 길이라는 생각만 했어요. 하지만 누구에게도 아첨할 줄 모르는 그를 아무도 장관으로 추천하지 않아 장관직에는 오르지 못했죠.”
노태우(盧泰愚) 정권에서 자신의 위상이 누구를 장관에 밀 만한 ‘실력자’가 못 되었던 까닭에 이 전 차관 같은 ‘원칙주의자’가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의 표시였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