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와일드 카드’의 미덕은 ‘리얼리티’다. 영화에 나오는 사례는 모두 사실을 토대로 한 것이다. 방재수 형사(양동근)가 불심 검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여성에게 접근하는 것도, 소속이 다른 두 경찰이 범인 한 명을 놓고 서로 데려가겠다며 다투는 것도 모두 실제 이야기다. 이 영화에 소개된 일화들은 대부분 베테랑 형사 이순재씨가 제공한 것이다. 이 형사는 영화의 소재가 된 ‘아리랑 치기’나 ‘퍽치기’ 일당을 5년간 1000명 가량 검거한 실적이 있다. 영화 속 오영달의 실제 모델인 이 형사와 오영달을 연기한 영화배우 정진영이 한 자리에 모여 ‘와일드 카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진영=영화 어떠셨습니까?
▽이순재=지금까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형사는 딱 두 종류예요. 코미디언 뺨치게 웃기거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거나. 지금까지 형사 영화를 끝까지 본 게 없어요. 희화화하면 불쾌하고, 폼나게 그리면 부담스럽고.
그런데 이 영화는 리얼리티가 살아있어요. 실제 사례를 김유진 감독에게 제공했으니까. 형사인 내가 영화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어요. 모처럼 형사들이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영화가 나와 기쁩니다.
▽정=휴∼, 다행이네요. 사실 이런 만남이 제일 부담스러워요. 실제와 다르다고 하면 할 말이 없잖아요.(웃음) 영화 찍으면서 흉내만 내봤지만 형사, 그거 정말 못할 직업같아요. 너무 위험하니까. 전 겁이 많아서 죽어도 못하겠어요.
▽이=형사 중에도 겁 많은 사람 있어요. 극 중 장칠순 형사(김명국)는 칼 맞은 뒤로 칼만 보면 도망가잖아요. 칼을 맞아본 사람은 알아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저도 목에 들어오는 칼을 피하려고 고개를 숙이다가 이마에 스친 적이 있어요. 성형 수술 2번해서 흉터를 주름살 속에 감췄죠.
형사들은 누구나 한번쯤 강력계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만 6개월을 못 버티고 나가는 사람이 태반이에요.
▽정=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많았지만 이 영화는 형사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유지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거친 수사 과정을 가감없이 담을 수 있었어요.
가령 극중 오영달 형사가 유흥업소 사장인 도상춘(이도경)에게 죄를 면해주는 대가로 범인의 정보를 빼내는 대목도 부정한 거래라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이=도상춘이 ‘저 형사는 돈 몇푼 받고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정말 가슴이 뭉클합디다. 맨 처음 김유진 감독이 ‘형사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며 자문을 구하는데 탐탁지 않았어요. 또 얼마나 형사를 우스운 꼴로 만들까 걱정했지만 영화를 본 뒤 그런 불신이 싹 가셨어요.
▽정=그런데 그렇게 위험한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목숨 걸고 범인들과 싸우지만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피해자들 때문에 합니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딸을 강간한 범인을 잡은 적이 있어요.
법적 판단은 판사가 하지만 그 범인을 잡은 순간 정말 죽여버리고 싶더라고요.
피해자의 마음을 생각하면 이 일에서 손뗄 수 없어요. 오랫동안 ‘작업’해서 힘겹게 범인을 잡았을 때 그 쾌감은 말로 다 못해요.
▽정=그러고보면 영화배우와 형사의 직업적 특성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형사들은 사건 터지면 잠복하느라 집에 못 가고, 영화배우는 영화 시작하면 밤새 촬영하느라 집에 못가고…. 물론 형사들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을 하지만.
▽이=누구나 그렇지만 형사들은 특히 부인을 잘 만나는게 정말 중요해요. 다행히 좋은 아내를 얻어서 그나마 가정이 잘 굴러가고 있죠.
집안 일에 신경쓰면 이 일은 못해요. 애가 무슨 학원을 다니는지, 성적은 어떤지 전 하나도 몰라요.
▽정=영화배우도 마찬가지에요. 생활패턴이 일정치 않으니까 집안을 돌보기가 어렵죠.
저도 다행히 아내를 잘 만났죠. 그래도 저는 아이 유치원은 아는데….(웃음)
▽이=영화 시작할 때 잘 되게 해달라고 고사지내잖아요. 형사들도 그래요. 범인이 잘 안 잡히면 형사 몇 명이 돼지머리 사들고 산에 올라가서 고사 지내요.
미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의욕을 다지는 계기는 되죠.
▽정=형사들의 애환에 대해 막연하게 그냥 짐작만 했는데 영화 찍으면서 ‘오늘 무사히 넘긴 하루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누군가의 희생 덕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감사합니다. 그런데 영화 ‘약속’에서는 깡패 역할을 그렇게 잘하시더니 이번에는 형사 역을 어쩜 그렇게 잘 하셨는지, 영화 배우라는 직업을 다시 보게 됐어요.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영화 '와일드 카드'는…▼
오형사(정진영)는 관내에서 ‘퍽치기’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신참 방형사(양동근)와 함께 범인을 뒤쫓는다. ‘퍽치기’는 행인의 머리를 둔기로 내려친 뒤 금품을 빼앗는 것. 단서나 목격자를 찾을 수 없었던 오형사는 전과자들을 대상으로 탐문수사에 들어간다. 어느날, 범인으로 추정되는 4인조에게 강간당한 여자가 나타나면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포착된다. 16일 개봉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