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5일장에는 최근 갖가지 산나물이 많이 나와 전국에서 많은 손님들이 찾고 있다. -정선=최창순기자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장터에는 정선아리랑의 노랫가락이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12일 새벽 강원 정선군 정선읍 봉양리. ‘정선 5일장’을 맞아 2300평 장터에는 230개 점포와 160여개의 노점이 아침 일찍부터 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오전으로 들어서면서 난전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깎으려는 손님들과 하나라도 더 팔려는 상인들의 흥정소리로 왁자지껄해졌다.
시장번영회 김부흥(金富興·47) 회장은 “시골 장은 시끌벅적한 게 제격입니다”며 “산나물이 제철이다 보니 도시 손님들이 많아져 더 붐비는 것 같습니다”며 희색이 만면이다.
인구 1만2800여명의 소도시 좁은 장터에 450여명의 관광열차(객차 6량) 관광객과 외지 관광객 등 1000여명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정선 5일장은 ‘시장’이라기보다 ‘축제’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정선 5일장은 1966년 2월 17일 처음 열린 이후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시골 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1999년 3월부터 운행되기 시작한 ‘정선 5일장 관광열차’가 기폭제가 되면서 ‘전국적인 유명 장터’로 급부상했다. 70∼80개이던 노점상이 2배가 넘는 160개로 늘었다. 정선장의 길목인 동면 북면 임계면 관광지까지 덩달아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군 전체의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있다.
정선 5일장이 오늘 같은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정선 사람들의 짜임새 있는 노력이 숨어있었다.
관광열차라는 판매루트를 개발한 데 그치지 않고 상품개발(산나물 한우)과 홍보마케팅(서울 수도권 일대)을 병행했으며 조직원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뭉친, 기업형 경영을 구사해 이뤄진 성과라는 지적이다.
이 열차운행의 산파역인 정선군 관광기획팀 김진숙(金鎭淑·여·32)씨는 “죽는다는 각오로 뛰었습니다. 주민들이나 공무원, 그리고 각 사회단체들 모두가 뭉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주민들의 단결력은 대단했다. 2001년 11월 장터 활성화를 위한 ‘주민 토론회’를 열어 개선 아이디어를 모았다.
정작 관광열차가 운행되고는 있지만, 협소한 ‘장터’ 면적이 최대의 난제로 부각되었기 때문.
주민들은 이때 장터에 이르는 170m의 도로에 차량통행을 전면금지하는 파격적인 안에 동의했다. 관광객을 위해 주민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이 같은 노력은 급기야 성과로 나타났다. 5일장 관광열차 운행 첫해인 1999년(3월∼12월) 열차관광객이 2만8880명(57회), 관광버스 및 승용차 관광객이 3만4500명 등 모두 6만3380명이었으나 2002년에는 관광객이 8만569명으로 늘어났다.
경제효과도 1999년 27억3000여만원이던 것이 2001년 55억원, 2002년 46억여원으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관광객 모으기뿐 아니라 ‘품목’ 개발과 서비스 개선에도 주력했다.
정선장은 당초 약초로 유명했다. 이 때문에 80년대 중반까지 황기를 이용한 백숙, 족발, 불고기, 보쌈 등의 음식이 소문나 있었다.
그러나 이 극소수 품목만으로 손님을 모으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정선 주민들은 더덕 산나물 등을 장에 올리는 등 상품을 다양화했다. 이 덕분에 장날만 되면 정선의 소득은 껑충 뛰어오르고 있다. 황기 당귀 등 약초를 취급하는 강원남부생약조합의 경우 하루 300만∼400만원으로 평소의 8배, 정선산 한우를 취급하는 정선축협은 300만원으로 2배, 장터 주변 식당들도 평균 50만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선군은 1988년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 시책으로 탄광 근로자의 지역 이탈이 가속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철도청이 96년 증산∼구절리 정선선(45.9km)의 철도운송 감소로 매년 30억∼40억원의 적자가 발생한다는 이유로 철도 폐선을 추진하자 군 전체는 큰 좌절에 빠져들었다.
이때 지방자치에 대비해 조직되었던 군 관광기획팀이 착안한 것이 ‘정선 5일장 관광열차’.
이 열차는 정선 장날(2, 7일)에 맞춰 당일 서울을 출발해 정선장을 둘러보고 돌아가는 철도 관광 상품이다. 당시 사회적으로는 ‘건강과 무공해 식품 신드롬’ 현상이 크게 일던 터여서 이 관광열차 상품은 대 히트를 쳤다.
판매루트 개척에 이어 나선 것은 홍보와 마케팅. 정선군은 서울 청량리역 등 수도권 주요 철도역에 홍보물 1만1000여부와 현수막 20개를 설치하며 대대적인 홍보를 벌였다.
1999∼2000년에는 수도권 지하철 객차에도 관광열차 홍보물을 설치하고 2000년부터는 아예 수도권 주요 전철역에 대형 전광판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홍보에 나서고 있다.
김원창(金源昌·59) 정선군수는 “주민과 시장번영회 등 관련 단체, 공무원들이 모두 합심하고 노력한 결과”라고 말했다.
정선군은 ‘정선 5일장’을 연계한 관광개발 사업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북면 여량 ‘아우라지 관광지 조성사업’이 바로 그것. 지난해 시작돼 2006년까지 200억원의 사업비가 투자돼 아우라지 일대 3만7450평을 테마관광지로 개발한다.
동면의 화암약수와 화암동굴 관광지 일대에 대한 개발사업도 꾸준히 벌이고 있다.
전국적으로 제법 알려진 이들 관광지와 아우라지 관광지, 그리고 ‘정선 5일장’을 하나의 관광코스로 묶는 ‘환상의 정선관광 투어 코스’를 개발 중이다.
지금 정선은 석탄산업 침체로 사람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고스란히 보존된 청정자연을 최대의 자원으로 역활용해 화려한 재기를 꿈꾸고 있다.
정선=최창순기자 cschoi@donga.com
●정선읍은…
강원 정선군 중서부에 위치한 정선읍은 북쪽으로는 평창군 진부면,서쪽으로는 평창군 대화면과 평창읍 남쪽으로는 신동읍, 동쪽은 동면 남면 등과 접하고 있다. 고구려 때 잉매현, 신라 때 정선,고려 때 삼봉(三鳳), 도원(桃原), 심봉(沈鳳) 등으로 이름이 바뀌어 왔다. 공민왕 2년(1353)에 다시 정선으로
개칭돼 조선 500년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정선군의 중심지로
정치 행정 경제 교육 문화의 중심지다.현재 인구는 1만2777명.
면적은 231.38km²로 석탄산업 합리화가 추진되기 직전인 87년까지는 1만8613명이 모여 살았다. 행정 구역은 34개 행정리(224개 반) 85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돼 있으며 최근에는 내륙 관광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인근에는 해발 1200∼1300m의 가리왕산
청옥산 등이 있어 산나물 산지로 유명하다.외진 산골이라 예부터 각종 약초가 유명하다. 특히 ‘정선황기’는 전국에서 인정받는 품목.석탄산업 침체와 함께 지역경제가 사양길을
걸어왔으나 이 덕분에 천년 신비의 자연 비경은 고스란히 간직한 상태. 최근에 동강과 화암약수, 화암동굴, 아우라지 등 무공해 관광지들이 알려지면서 점차 새로운 관광지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국가정보원장으로 임명된 고영구씨, 탤런트 심양홍, 황범식씨, 영화배우 원빈씨 등이 이곳 출신이다.
●정선아리랑硏 진용선 소장
신동읍 조동리 ‘정선아리랑연구소’ 진용선(秦庸瑄·40·사진)소장은 ‘정선아리랑의 전파자’로 불린다. 그의 남다른 정선아리랑 연구 활동 및 노래 보급 열의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연구소는 국내뿐 아니라 일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 정선군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로 꼽힌다.
조동리가 고향인 진 소장은 1989년 ‘고향의 얼’인 정선아리랑을 지키기 위해 귀향해 14년째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1986년 대학을 졸업한 진 소장은 88년까지 싱가포르 휴먼서비스 독일어 통역담당관과 한양합판주식회사 영어교육 담당 등의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86년부터 정선아리랑에 심취해 녹음기와 노트 하나만 들고 정선아리랑이 깃든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93년까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러시아 등을 찾아다니며 400수로 알려졌던 정선아리랑 가사를 1380수로 재정립했다.
이어 1993년 동면 화암리에 정선아리랑학교를 개교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10여년 동안 9700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내외국인과 관광객들까지 합치면 그 인원은 족히 수만 명은 넘을 것이라는 추산.
“처음에는 딱딱한 민요학교가 운영되겠느냐며 모두들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학교를 개교하자 호응이 무척 높아 놀라웠지요….”
진 소장은 정선아리랑 국제화에도 노력하고 있다. 98년부터는 수학여행오는 일본 호소다고교생들에게 정선아리랑을 전수하고 있다. 이 인연으로 최근에는 정선군이 일본과의 자매결연 사업도 추진 중이다.
진 소장은 “정선아리랑 마니아를 많이 만드는 것도 지역개발에 앞장서는 것 아니겠느냐”며 “학술 및 문학적으로 더욱 쉽게 접근하도록 해 정선아리랑 전파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그는 귀향 후 10년 동안 20여권의 정선아리랑 관련 책자를 냈다. 이 같은 공로 95년에는 ‘자랑스러운 신한국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선=최창순기자 cs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