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가 생활사박물관인가요? 몇 시에 열고 몇 시에 닫나요?” ‘한국생활사박물관’ 1, 2권을 출간하고 나서 일간지에 낸 광고를 보고 걸려온 전화였다. ‘역사신문’을 출간했을 때도 “역사신문을 구독하고 싶다”는 전화를 일년이 넘도록 받아야 했다. 이처럼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형식의 책을 출간할 때면 책에 대한 독자들의 굳어진 인식도 함께 깨나가야 하는 힘겨운 일이 뒤따른다. 그러나 홍보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고 나면 그때부터 책들이 독자의 사랑을 꾸준히 받음은 물론이다. 전혀 새로운 장르의 책을 만들 때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가장 큰 즐거움과 뿌듯함을 느낀다.
▼ ‘박물관 형식’등 새 장르 개척 ▼
책 만드는 일을 한 지 30년 가까이 돼 가지만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책을 만드는 즐거움을 발견한 지는 10년이 채 안 된다. 경영을 맡기 전 편집장 시절에는 전투적으로 일을 했던 기억밖에 없다. 당시는 ‘코란도’를 자주 몰고 다녀 ‘코란도 아줌마’라는 별명을 들어가면서 기획과 편집뿐 아니라 제작까지 도맡아 했다. 제책사에서 갓 구운 빵처럼 금방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책을 싣고 와 회사의 3층 서고까지 낑낑대며 나르기도 했고, 오전 두세 시라도 우리 책이 인쇄에 들어간다는 연락이 오면 색깔 교정을 보기 위해 인쇄사로 졸린 눈을 치뜨며 달려가기도 했다. 좋은 인쇄를 위해 제작처 담당자들을 사랑하는 애인보다 더 자주 연락하고 만났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는 우리 출판사의 핵심역량에 맞는 방향을 찾지 못한 채 이책 저책 두서없이 만들던 시절이기도 했다. 물론 1980년대 초 진보적 사회이념의 기치를 내걸고 사회과학출판사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출발하긴 했으나, 내가 편집장을 맡았던 때는 구소련의 붕괴로 이미 마르크시즘에 뿌리를 둔 사회과학 이론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진보적 이념의 대중화로 출판 방향을 선회하긴 했으나 전문 영역을 찾아 깊이 뿌리내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내가 90년대 중반 경영을 맡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회사 사정이 어려웠을 때 왜 내가 겁도 없이 경영을 맡겠다고 자처하고 나섰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경영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 역량도 부족한데 말이다. 바로 그 부족함 때문에, 나는 경영을 맡고서도 동료의식을 잃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출판의 방향이나 출판사의 운영시스템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거나 공부하면서 서로의 속내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서서히 찾아나갔다. 아동, 청소년, 인문 분야에 집중하면서부터 출판사의 브랜드 이미지가 차츰 높아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시절의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했던 직원들에게 남달리 뜨거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아무리 획기적이고 새로운 기획을 하더라도 그 기획을 채우고 마케팅 전략을 세워 실행하는 건 직원들과 더불어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런 시스템이 활성화될 때 창조적 기획을 직원들이 활발하게 할 수 있고, 나아가 회사의 비전과 목표까지 고민할 수 있으리라. 직원들 한사람 한사람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뭔가를 찾아내 조절해 주거나 더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경영자의 몫일 뿐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직원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날 발견하고선 섬뜩함을 느낀다. 나도 어느새 사장이라는 직책으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맛에 길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사갈 때 버리지 않게 만들터 ▼
꿈? 독자들이 이사 갈 때 절대로 버리지 않는 책을 만드는 것과 지금 한창 무더기로 피어 있는 새벽 별 닮은 꽃마리 앞에서처럼 허명(虛名)에 물들지 않고 직원들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
▼경력 ▼
△한국신학연구소 근무(1982∼86년) △사계절출판사 편집부장(1987년) △사계절출판사 대표(1995년) △한국출판인회의 ‘올해의 출판인 대상’ 수상(2001년) △한국출판인회의 총무위원장
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