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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韓派 네트워크]러시아…교류역사 짧아 '1인 多役'

입력 | 2003-05-15 19:06:00


《모스크바 프로프사유즈나야 거리에 있는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 맞은편에 있는 극동연구소와 함께 1980년대 말부터 한국과의 비공식창구 역할을 했던 한-러 수교의 숨은 산실이다. 러시아 내 지한 인맥의 주류인 100여명의 한반도전문가들은 9일 이곳에 모여 코리아연구센터를 발족시켰다.》

▼'코리아 전문가' ▼

한국전문가들은 모스크바대나 모스크바국제관계대(MGIMO) 등의 한국관련 학과에서 공부한 후 정부기관과 대학연구소를 오가며 연구와 실무에 종사하고 있다. 학연으로 얽혀 있어 개인적으로 잘 알고 결집력이 강한 것이 특징.

▼연재물 목록▼

- 유럽…"일본은 잘 알지만 한국은…"
- 중국…유력인사 드물어
- 일본…"친목 넘어 정책교류"
- 미국…공화당 인맥 부실

한-러 교류 역사가 짧은 탓에 이들은 한국보다는 북한 유학파가 많다. 주로 북한을 통해 먼저 공부한 뒤 한국으로 영역을 넓혔다. 이 때문에 남북한 구분 없는 ‘한반도전문가’로 불리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번에 설립한 연구소 명칭도 ‘한국’이 아닌 ‘코리아’로 정했다.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도 이들은 북한과 미국 모두에 책임이 있다는 양비론을 펼치면서 북한의 체제와 안전보장을 토대로 한 대화를 주장하고 있다.

한국전문가 풀(Pool)이 협소하다보니 관계 학계 등 여러 분야를 장벽 없이 넘나들며 활동하기도 한다. 발레리 데니소프 전 북한주재 러시아 대사나 후임인 안드레이 카를로프 현 북한주재 러시아 대사 등은 원래 학자 출신. 데니소프 전 대사는 평양에서 귀국한 후 MGIMO로 돌아갔다.

▼인맥의 한계 ▼

올해로 한-러 수교 13년을 맞지만 양국관계가 수교 당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 그만큼 지한파의 입지가 취약하다. 외무부 내에서도 아태국장이나 아시아담당 차관은 물론 주한 러시아 대사직까지도 지한인사가 아닌 중국통이나 일본통이 차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한 러시아 대사를 지낸 예브게니 아파나시예프 아태1국장은 중국통. 게오르기 쿠나제 전 주한 러시아 대사도 일본전문가다. 현 테이무라스 라미슈빌리 주한 러시아 대사도 한국과 별 인연이 없는 인권외교전문가다.

한-러 수교 전후 활약했던 ‘거물급 지한파’들도 요즘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 총리는 IMEMO 원장 재직시 한-러 교류를 적극 주도했지만 1997년 외무장관 때 한-러간 외교관 맞추방 사건을 겪으면서 한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됐다.

한반도전문가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인연으로 지한파로 분류되는 인사도 있다.

세르게이 스테파신 감사원장(전 총리)은 한국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은 정치지도자로 꼽힌다. 2001년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의원과 친분이 깊다.

현재 러-한 친선협회장은 언론인 출신인 비탈리 이그나텐코 이타르타스통신 사장(전 부총리)이며 러-한 의원외교협의회장인 세르게이 이바넨코 하원의원은 부인이 한국계라는 인연이 있다.

예브게니 바자노프 외교아카데미 부원장은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시절부터 친분을 쌓았고 외교아카데미에서 정치학박사를 받도록 주선했다.

▼고려인 인맥 ▼

러시아 내 15만 한인동포(고려인)들도 한-러 관계를 떠받치고 있다.

다만 최근 김 게오르기 동방학연구소 제1부소장과 허진(許眞) 유라시아대 이사장, 한 막스 전 고려인연합회장 등 원로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고려인 인맥에도 세대교체가 진행 중이다. 현재 고려인연합회는 조 바실리 회장이 이끌고 있다.

이르쿠츠크시(市)가 지역구인 유리 텐(한국명 정홍식·51) 하원의원은 현재 유일한 한국계 의원으로 한-러, 북-러 정상회담에 빠짐없이 수행하고 있다. 그는 올해 12월 총선에서 4선 고지에 오른 후 이르쿠츠크나 사할린 주지사 선거에 도전할 계획이다.

구 소련 시절 의회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었던 김영웅 박사(정치학)는 현재 러-한 의원외교협의회 사무국장을 맡아 텐 의원을 돕고 있다.

이 블라디미르 외교아카데미 아태센터 소장도 통일문제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문화계에서는 원로사학자이자 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 소장인 박 미하일 교수가 삼국사기를 러시아어로 완역하는 등 러시아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유리 텐 한국계 하원의원 "러시아인들 의리 중시"▼

“같은 50대의 ‘젊은 대통령’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주 만나 친구처럼 가까워진다면 한-러 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러시아 의회의 유일한 한국계 의원인 유리 텐 하원의원(사진)은 “긴급한 현안이 생겼을 때 터놓고 의논해 문제를 풀 수 있는 양국간 ‘통로’가 아직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에 지한파들이 있다고 하지만 이들과 인간적인 신뢰관계를 쌓은 한국 인사가 얼마나 되겠느냐”는 게 그의 반문이다. 친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러시아인들은 유럽인들과는 달리 ‘동양적 의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섣불리 이해관계만 갖고 덤벼들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그 역시 정치를 시작하기 전 맺었던 한국인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고 있다. ‘무명’ 사업가 시절이었던 1990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던 중소기업인들을 잊을 수 없기 때문. 3선 의원이 된 요즘엔 한국에서 훨씬 비중 있는 인사들과 만날 기회가 많지만 여전히 ‘오랜’ 친구들이 우선이다.

반대로 반공주의자였던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은 구소련 인사들이 보여준 의리에 소련과 가까워진 사례. 드골 전 대통령이 1953년 정계를 떠나 야인이 됐을 때도 소련 지도자들은 전과 다름없이 친분을 유지해 58년 극적으로 정계에 복귀한 드골 전 대통령이 두고두고 고맙게 여겼다는 것이다.

텐 의원은 최근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역할이든 하겠다’는 뜻을 크렘린에 전했더니 세르게이 프리호드코 대통령외교수석비서관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