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선, 산시(시와시학사)
새는 산 속을 날며 그 날개가 산에 닿지 않는다
- 이성선, ‘새’-산시·14
모처럼 토요일 날 벼르고 별러 가족끼리 산으로 소풍을 나왔다. 돗자리를 펴고 모자라 그날치 신문을 깔고 앉아 김밥을 먹다가 문득 이 지면이 눈에 띈다. 두 줄짜리 시를 읽은 당신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멀리 산을 바라본다. 짙푸른 초록산 위로 흰 새가 날며 그 날개가 산에 닿지 않는다. 잠시 김밥을 주워 올리던 젓가락을 멈추고 망연히 새를 바라본다.
새처럼 땅을 놓아버리고 훨훨 날아오르고 싶어진다. 든든한 바닥이라 여기던 것들이 무거운 짐이었음을 깨닫는다. 새는 산골 아낙네 해 저물도록 오리걸음 하던 비얄밭을, 가파른 능선과 계곡을 연줄처럼 가볍게 일직선으로 풀며 날아간다. 당신은 여리디여린 뱃살로 사금파리 모래땅을 쓸며 가는 달팽이와 저보다 더 큰 똥경단을 굴리며 가는 쇠똥구리의 노고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문득 겨드랑이가 근질거린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산과, 나뭇가지에 다쳐왔던지 당신의 겨드랑이엔 깃털의 흔적도 없다. 먹던 김밥을 두고 날아오르려던 당신은 다시 신문지 바닥으로 추락한다. 간절히 기도하는 자가 가장 아픈 자이듯, 초월을 꿈꾸는 자는 가장 많이 부딪힌 자이다. 당신은 다시 저 짤막한 시구를 중얼거린다. ‘새는 산 속을 날며 그 날개가 산에 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것’만이 비상(飛翔)일까? 연(蓮)은 진창에 살지만 그 잎이 진흙에 묻지 않고, 지렁이 역시 거름탕 속을 기나 그 살갗에 두엄이 묻지 않고, 달은 가시나무 위로 뜨나 그 얼굴에 생채기가 생기지 않는다. 연이 진창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지렁이는 두엄을, 달은 가시나무를 가장 잘 아는 까닭이다. 지금 이곳을 가장 잘 아는 이만이 초월할 수 있다. 푸른 하늘만 아는 새는 추락할 뿐이다.
당신은 가만히 새들이 날아간 쪽을 바라본다. 새들에겐 저 나뭇가지 우짖는 푸른 산이 시장통이요, 강풍 몰아치는 창공이 저잣거리인지도 모른다. 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은 창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땅에 되앉기 위해서이다. 산이 새들을 풀어놓고도 그 뒤를 좇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세상엔 시를 써놓고 죽는 사람과 죽어서 시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유난히도 산과 새와 달을 좋아했던 이성선은 죽어서 마침내 그것과 하나가 되었다. 이성선도 알았으리라, 달과 새가 아름다운 것은 벼랑과 초월을 동시에 응시하며 뜨기 때문이다.
반칠환 시인
* 두 해 전 세상을 떠난 시인 이성선의 시에 한국화가 김양수씨의 수묵담채를 얹은 시화집 ‘산시’가 재출간되었다. 생전에 이를 시화집으로 내고 싶어 했던 시인의 꿈은 그가 세상을 뜬 뒤 이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