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김성근 전 LG 감독의 회갑연. 고집불통의 전임 감독 회갑연에 100여명의 제자와 프런트 직원, 팬들이 모였다.왼쪽부터 LG 이상훈, 계형철 전 한화코치, 김 전 감독, 이광길 SK코치, 이연수 성균관대 감독, SK 김기태 선수. -동아일보 자료사진
‘반쪽발이.’
김성근(金星根·61) 전 LG트윈스 감독을 사람들은 한때 이렇게 불렀다. 재일교포 출신인 그에 대한 이유 없는 경멸의 표시이자, 그가 선수를 기계 부품처럼, 필요한 반쪽만 사용한다는 혹평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계를 최근으로 돌려보자. 지난해 12월 12일 서울 리츠칼튼 호텔에선 그의 회갑연이 열렸다. 시즌이 끝나자마자 LG트윈스에서 중도 해임을 당한 그였기에 회갑연 또한 썰렁할 것으로 예상됐었다. 인심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니까.
그러나 축하객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여든 그의 제자들만 해도 야구단 2∼3개 팀은 만들고도 남을 만한 수였던 것이다. 그가 지휘봉을 잡았던 옛 OB, 태평양, 쌍방울, 그리고 삼성과 LG트윈스의 전현직 선수와 코치들이 모두 모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그를 잘랐던 LG트윈스 프런트 직원들의 모습까지 보였다. 그의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내 인생은 줄곧 외줄타기였지. 일본에선 ‘조센징’으로, 대한민국에선 ‘쪽발이’로 불렸어.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어. 실력을 기르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이었지. 오로지 야구에만 매달렸어.”
핍박을 하나하나 이겨내는 성취감은 마약보다 매력적이었다. 이 때문이었을까. 김성근은 30여년의 지도자 생활을 관통하는 팀 운영 철칙으로 ‘이 세상의 모든 선수는 감독 앞에 평등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스타플레이어든 무명이든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선수를 중용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실천에 옮긴 것.
“드러난 성적만 보고 평가하면 안돼. 타율 3할2푼을 쳐야 될 타자가 3할에 머물렀고 2할5푼의 타자가 2할7푼을 쳤다면 후자가 칭찬받아야 돼. 게으른 토끼보다는 능력은 떨어져도 부지런한 거북이 인정받아야지. 미래가 있는 팀은 거북이 많은 팀이야.”
지난해 LG트윈스의 감독이었을 때 국내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병규를 호통 쳐서 2군으로 내려 보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LG는 병든 팀이었어. 바뀌지 않는다면 서서히 죽어갈 수밖에 없었지. 선수들 사이에선 1∼2년 반짝 성적을 올린 것 가지고 내가 최고라는 자만심이 팽배했어. 먼저 의식을 바꾸는 게 급선무였지.”
89년 태평양에 부임했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태평양은 우승은커녕 단 한번도 상위권에 올라보지 못한 만년 꼴찌 팀. 선수들은 강팀을 만나면 지레 겁부터 먹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대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겁 없는 어린 선수들을 과감히 발탁했어.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의 투수 삼총사는 이 과정에서 탄생했지. 선발 투수만 세 명이 바뀌었으니 완전히 새 팀이 된 거지. 서로가 운이 좋았던 거야. 진흙 속에 이런 진주들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결국 태평양은 그해 곧바로 3위에 올랐고 가을 준플레이오프에선 천하의 삼성을 2승1패로 꺾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그가 나이 들어 부진한 선수들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태평양 시절 세간의 화제가 됐던 ‘임호균(林昊均) 파문’이 대표적인 경우.
89년 돌풍으로 주가를 한껏 끌어올렸지만 김성근은 이듬해 곧바로 시련을 맞게 된다. 구단은 임호균이 고액 연봉자지만 더 이상 밥값을 못한다고 판단하고 그와 재계약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선수의 방출과 영입은 구단의 전결 사항이었다. 그러나 김성근은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임호균을 안 쓰면 간단했지. 사실 그가 없으면 안 될 정도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게 면피는 될지언정 나를 믿고 따르는 선수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도리는 아니었지. 임호균은 인천 야구가 낳은 최고의 스타였어. 야구 선배로서 쓸쓸한 말년을 맞게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었지. 지금은 작고하신 신동관 사장께 무작정 쳐들어갔지.”
결국 김성근은 ‘임호균이 90년 시즌에 5승을 올리지 못하면 내가 옷을 벗겠다’는 각서를 쓴 뒤 사장실을 박차고 나왔다. (계속)
▼김성근 전 LG감독은?▼
한국 프로야구의 진기록 보유자.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의 투수코치로 시작해 OB(84∼88년), 태평양(89∼90년), 삼성(91∼92년), 쌍방울(96∼99년), LG(2001∼2002년) 등 5개 팀 감독을 지냈다. 타협을 모르는 성격 탓에 맡은 팀에서 모두 중도 해임을 당했지만 그때마다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그를 찾는 팀이 나타나곤 했다. 2군 감독을 했던 해태까지 치면 롯데와 한화를 뺀 6개 구단의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말을 거의 몰랐던 재일교포 2세로 64년 영구 귀국했고, 국가대표팀 왼손 투수로 활약했다. 요즘은 전국을 다니며 초중고 대학팀 가리지 않고 소질 있는 후배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며 살고 있다.
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