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변했다고 한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 어리둥절할 지경이란다.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정말 노짱 맞아?’하는 소리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하기야 불과 몇 달 전 만해도 “미국에 안 가면 반미(反美)주의자냐, 반미면 어떠냐?”던 그가 “53년 전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쯤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싶다.
그러나 “북의 요구대로 따라만 갈 수는 없다”는 노 대통령의 인식은 긍정적인 변화다. 그는 이제 비주류 정치인이 아니다. 청문회에서 목청을 높이던 야당 의원도 아니고 운동가는 더욱 아니다. 하나의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최고 지도자다. 그런 그가 명분은 그럴싸하더라도 비현실적인 ‘민족공조’보다 비록 자존심은 상하더라도 현실적인 ‘한미동맹’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편 가르기 부르는 비주류의식 ▼
문제는 변신의 과정이 생략된 듯하다는 데 있다. “한반도 불안해소를 하러 갔는데 미국에 듣기 싫은 소리나 하면 되겠는가”라든지 “나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는 정도로는 미흡하다. 뒤늦게 대통령이 된 뒤 생각해 보니 다르더라며 여러 해명을 했지만 그보다는 미리 변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모습이나마 보여야 했다. 그래서 갑작스레 변한 것은 아니라는 국민의 공감을 얻어야 했다. 그렇지 못한 데서 상황에 따라 말이 또 바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따르는 것이다. ‘장(場)의 논리’로는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이제 ‘주류의 안정성’을 보여야 한다. 나는 노무현 정권의 초기 3개월이 ‘불안정한 아마추어’의 티를 벗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핵심세력이 여전히 비주류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라고 본다. 노 대통령은 얼마 전 “내가 자조적 냉소적 표현을 자주 쓰는 버릇이 있다. 그간 비주류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생긴 습관 같다”고 말했다. 자조와 냉소는 정서적 열등감과 외형적(도덕적) 우월감의 복합적 산물일 수 있다.
이 미묘한 심리상태가 권력과 결부되면 조급하게 주류사회의 헤게모니를 추구한다. 그 과정에서 이분법적 편 가르기는 피하기 어렵다. 집권측이 보다 중요한 국정과제에 앞서 ‘빅3 신문과의 긴장관계’에 집착한 데도 비주류의 피해의식이 과도하게 작용한 게 아니겠는가. 권력의 언론에 대한 긴장관계 요구를 탓할 건 없다. 그러나 그것이 도를 넘어 또 다른 편견과 적대감이 되어서는 ‘내부 분열과 국력 낭비’를 자초할 뿐이다.
이제 노무현 정부는 새 출발을 해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냉소와 자조의 주변부의식에서 벗어나 한 시대를 책임진 주류로서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넓게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두르지 말고 시대의 흐름을 리드해 나가야 한다.
새 시대가 노 정부에 우선 요구하는 것은 3김 시대의 그릇된 유산을 극복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끼리끼리 식 인치(人治)를 버리고 법과 제도에 따른 시스템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대통령이 국정 현안 모두에 일일이 나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책임총리제’라고 소리는 요란했지만 최근의 물류대란에서 보듯 총리와 내각은 사태의 뒷수습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청와대는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386세대가 ‘점령했다’고 하고 거기에 온갖 ‘명함특보’까지 가세하려는 모양이다. 이래서는 시스템 정치는커녕 자칫 과거의 권력부패를 재현할 위험성이 크다.
▼사회세력 대탕평 주도해야 ▼
노 대통령은 미국 방문에서 인식의 대전환을 이루었듯이 이제 진정한 개혁과 통합을 위해 사회 모든 세력간 대탕평(大蕩平)을 주도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 사용자와 노동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더불어 살고 있는 우리의 공동체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고 번영할 수 있을 것인지, 나라의 미래를 위해 함께 고민하고 힘을 보태자고 호소해야 한다.
그러자면 노 대통령부터 비주류의식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동안 과연 ‘편견과 편식’은 없었는지 먼저 돌아보고 과감하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국민통합을 말하기에 앞서 새 출발의 각오로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이제 ‘노짱’은 없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