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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프리즘]선우석호/디플레이션 뛰어넘기

입력 | 2003-05-20 18:32:00


지난해 말 이후 한국에서도 혹시 나타나는 것 아니냐 하며 우려했던 디플레이션 현상이 점차 가시화하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물가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그 여파로 경기도 가라앉는 것을 의미한다. 4월의 소비재(消費財) 물가가 전년 동기 대비 1.9% 하락했고, 1·4분기 경제성장률도 3%대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면서 디플레이션 현상이 단순히 우려라고 떨쳐버리기에는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한국은 그동안 만성적 인플레이션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이와는 정반대의 현상인 디플레이션이 본격화할 경우 기업 투자자 정부 모두 혼돈에 빠질 위험이 있다. 우리 경제가 고성장시대에서 저성장시대로, 인플레시대에서 디플레시대로 돌입하고 있는 셈인데 이는 모두 과거에는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제상황이기 때문이다.

▼물가하락-경기침체 ‘경고음’▼

때마침 일본의 5대 은행인 리소나 은행이 부실채권과 주가하락을 견디지 못해 예금보호법에 의해 일본 최초의 공적 자금 투입 은행이 되었다. ‘리소나 쇼크’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악성 디플레와 장기침체가 금융위기를 촉발시킬 수 있는 원천임을 보여준 사례다.

일본과 더불어 세계경제의 축을 이루는 미국이나 독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위험수준에 점차 접근하고 있다. 미국은 최근 들어 생산자물가지수(PPI)가 1.9%로, 성장률도 1.6%로 각각 하락했다. 4월의 실업률은 6.0%로 2000년대 들어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1·4분기 개인소비도 전 분기에 비해 1.4%가 줄어드는 등 디플레이션 징후가 뚜렷해지고 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디플레이션 위협을 조심스럽게 경고하고 있다.

독일은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2·4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보여 93년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미국이 달러 약세 기조를 유지하며 유럽에 대한 저가수출을 확대하면서 유럽지역의 디플레이션 압력은 확산 일로에 있다. 아시아 국가들도 최근 달러에 연동된 중국의 위안화가 약세로 돌 것이기 때문에 중국 상품의 저가 공세가 한층 드세질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중국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은 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더욱 어려울지 모른다.

어쨌든 세계 각국이 디플레이션에 휘말릴 경우 개방경제인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다. 다만 한국은 그동안 지속적인 임금 및 유가 상승, 서비스가격 추가 상승 여력으로 디플레이션을 비켜가는 듯했으나 최근의 심각한 경기침체로 이런 요인들이 힘을 잃으면서 디플레이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인구 노령화로 소비가 더욱 둔화하고, 기술혁신과 규제완화 등으로 가격이 추가로 하락할 경우 디플레이션은 장기적이고 고질화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디플레이션 도미노 추세 속에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1만달러 소득에 눌러앉아 제로섬 게임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 힘이 들겠지만 새로운 도약을 통해 파이를 키울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새로운 도약은 경제활동이 왕성하게 일어날 수 있는,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서 창의와 혁신(innovation)이 부를 창출하는 경제 환경의 조성으로 시작될 수 있다.

▼투자여건 조성-투명성 확보 시급 ▼

첫째, 5%대 잠재성장에 대한 망상을 버리고 우선 저성장에 진입한 우리 경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저성장 경제란 평균적으로 투자에 따르는 수익이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익이 낮더라도 자본가와 경영자들이 자발적으로 투자를 결정하려면 투자에 따르는 위험이 낮아야만 한다. 현재와 같이 강성 노조와 각종 규제가 극성을 부리고 원칙이 쉽게 무시되는 예측 불가능한 환경은 위험을 높이기 때문에 경제활동이 당연히 위축된다.

둘째, 기업에 선택권(freedom of choice)을 돌려줘야 한다. 최근의 노조활동이 노조의 경영참여로 치닫고 있는 점은 이런 관점에서 심히 우려할 부분이다. 80년대 미국의 경제부흥이 기업의 분할 및 합병 등 자유로운 기업구조조정의 결과였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셋째, 투명한 지배구조의 정착이다. 이것 없이는 책임 있는 전문경영인의 양성이 어려울 뿐 아니라 장기성 외자 유치나 우리 기업 제값 받기가 불가능해진다.

이 모든 요인은 우리 경제가 디플레 위험에서 벗어나는 데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다.

선우석호 홍익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