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어질 당시인 2000년 전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로만바스박물관 대욕장의 모습. 온천욕을 즐길 수는 없지만 지금도 욕장에 차 있는 물은 40도 정도의 온천수다.사진제공 월드콤
‘물은 H2O 수소 둘, 산소 하나. 하지만 무엇인가가 더 있다.’
작가 D H 로렌스의 말이다. 과연 그게 뭘까?
중세 사람들은 물을 신이 내린 은총의 매개체(holy water)로, 신성에 의한 치유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근대 과학은 성천(聖泉)의 물을 광천수(mineral water)라 재명명하면서 질병을 치유한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이윤추구를 정당화하는 세속화의 물결이 온천장 비즈니스를 부상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영국의 바스(Bath)다. 목욕과 관련된 모든 명칭에 달라붙는 ‘바스’란 단어는 이 도시에서 출발했다.
● 제인 오스틴의 낭만적인 바스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은 또 다른 소설 ‘설득’(1818)에서 바스를 작품무대로 등장시켰다. 오스틴의 부모는 이곳 월코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의 아버지가 묻힌 곳도 이곳이다. 오스틴 역시 젊은 시절 여러 번 바스를 방문했다. 그래서 바스에는 ‘제인 오스틴 코스’가 관광상품이 되어 여행자들을 기다린다.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도 바스를 배경으로 한 ‘바스의 여장부(The Wife of Bath)’를 찾아볼 수 있다.
런던에서 기차로 1시간 반. 로마시대 이래로 스파의 중심이 되어온 도시 바스는 그 기원이 에이번강 계곡에 자리잡은 원형극장에서 시작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은 켈트족의 왕자, 블래더드가 세웠다고 한다. 그는 왕위 계승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병환자란 이유에서 돼지몰이꾼으로 품을 팔아야했다.
우연히 그가 기르던 돼지가 수증기 덮인 연못에 빠졌는데 어렵게 끌어올려 보니 앓고 있던 피부병이 다 나아 있었다. 그는 온천수의 치유력을 자기 몸으로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곧장 따뜻한 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병을 완치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왕좌를 차지한 그는 못에 온천을 짓고 자기의 이름을 붙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바스의 역사는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가 브리튼섬을 정복한 지 얼마 안 된 1세기 초반에 새로운 지배자들이 이 지역(당시 지명은 아쿠아에 술리스)으로 몰려들었다. 그 후 이곳엔 욕탕들이 들어섰고 서유럽에서 가장 인상적인 로마 건축물로 꼽히는 원주 기둥으로 둘러싸인 로마 욕탕도 이때 생겼다.
로마인들이 물러난 뒤 바스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종교의 본산이 되기도 했다. 그 후 오랫동안 세인들의 관심에서 잊혀졌던 이 도시가 18세기에 다시 기억 속에 되살아나 영국의 대표적인 온천도시가 된 것은 세 사람 때문이다.
도시 개축안을 내놓은 존 우드 1세와 자신의 채석장에 있던 돌더미를 건축재로 내놓은 랠프 앨런, 그리고 ‘무관의 바스왕’이라 불렸던 리처드 보 내시(1674∼1762)가 그들이다. 특히 내시는 이 온천 휴양지의 사교계를 조직했는데 화려하고 장식적인 옷을 좋아해서 눈에 거슬리는 몇 가지 복장에 대해서는 착용을 금지하는 규제안을 내놓을 정도로 독특한 인물이었다. 내시는 마지막 라운드없이 계속되는 놀이들을 고안해내서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의 유흥욕구를 만족시켰다. 덕분에 바스는 런던 밖 상류 사회 최고의 명소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은근히 이어지고 있다.
● 18세기의 사교장으로 변신한 로만바스
로마인들이 지은 공중목욕탕과 미네르바 여신을 위한 신전, 그리고 대도시가 발견된 것은 1880년. 그들이 떠나고 1500여년이 흐르도록 사람들은 이런 시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로만바스는 지면에서 약 500m 아래 건설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만바스의 시스템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과학적이다. 뜨거운 욕탕과 찬 욕탕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고 운동을 할 수 있는 시설도 있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온수 수영장인 대욕장(Great Bath)이다.
발견 후 바스는 금세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의 표적이 되었고 ‘목욕’을 가장한 사교를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도시 전체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우선 로열 크레센트(Royal Crescent). 이름 그대로 초승달처럼 생긴 이 건물은 30채의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스에 현존하는 18세기 유산 중 가장 아름답고 독특한 건축물로 손꼽힌다. 1987년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로만바스박물관 역시 꼭 들러볼 만한 명소다. 로마 시대엔 남녀 혼탕의 목욕탕이자 사우나장, 헬스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2000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대욕장 가장자리에 있는 돌들은 목욕을 즐기는 주인들의 손톱을 다듬고 마사지를 해주던 시녀들을 위한 장소로 추측된다. 목욕을 마친 후 본격적인 사교로 돌입하기 위해 들렀던 장소인 ‘펌프 룸(Pump Room)’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인기리에 영업 중인 이 온천 찻집에서는 건강에 좋다는 미네랄워터(펌프 룸에서 끌어올린 온천수)를 팔았다. 바스 온천의 원천 중 하나인 ‘왕 온천(The King’s Spring)’에서 샘솟는 이 미네랄워터는 지금 ‘스파워터’란 다른 이름으로 여행자들에게 판매되고 있다.
바스에서 가장 우아한 상점들이 몰려있는 밀섬 스트리트를 걷다보면 과거 100년간 번창했던 바스 스타일의 온천요법이나 생활방식을 짐작해볼 수 있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시민들과 자연스럽게 뒤섞인 여행자들 모두 부유한 옷차림에 한가롭고 여유있는 표정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를 모방해 만들었다는 펄티니 다리 위 상점에서 즐기는 쇼핑의 매력 또한 잊을 수 없다. 올해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물의 해. 감회가 남다른 바스로의 여행을 시도해볼 만하다.
여행칼럼니스트 nolja@worldpr.co.kr
● 찾아가는 길
인천공항에서 런던까지의 비행 소요시간은 약 11시간 55분. 런던에서 에이번주
브리스틀 남동부에 있는 바스까지는 기차로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 로만바스박물관과 제인오스틴센터
무료 오디오 투어가 있어 원하는 언어의
오디오를 들고 다니며 안내를 받을 수 있다.4∼9월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관하며 성탄절과 그 다음날만 휴관한다. 제인오스틴센터의 홈페이지는
www.janeausten.co.uk
● 기타
바스를 중심으로 한 영국 남부 도시 관광은 스톤헨지, 캔터베리, 브라이튼 같은 다른
도시들과 연계해 살펴보는 게 좋다. 영국
단독 일주 상품은 7일짜리 상품이 157만원 정도다. 문의는 하나로항공 여행사(02-734-3100). 또 바스에 관한 일반 여행정보는
영국 관광청 사이트(www.visitbritain.com)에서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