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깽판’, ‘양아치’,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죠’, ‘대통령직 못해먹겠다’, ‘개판’….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후보 시절과 취임 이후 발언해 논란을 빚은 비속어는 손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의 측근들은 노 대통령의 잦은 비속어 사용에 대해 “탈권위주의적이고, 대중 서민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소탈한 화법의 연장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이런 표현들이 대통령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불필요한 논란을 낳는다”며 “이 문제에 대한 대통령과 측근들의 안이한 인식이 오히려 문제 개선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의 비속어 사용은 특별한 의도없이 무의식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측근들은 말한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막노동판에서 일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서민적 삶을 살아온 그에겐 보통 사람들이 쓰는 비속어가 매우 익숙하다는 것.
그의 한 오랜 측근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노 대통령이 ‘정치 초년병’일 때 ‘제발 말씀 좀 조심하십시오’라고 건의했더니 ‘나는 원래 촌놈이어서 누가 뒤통수만 톡 쳐도 입에서 (막말이) 막 튀어나온다. 그러니 어떡하겠느냐’고 하더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현장의 정치’를 중시하고, 즉흥 또는 즉석연설을 즐기는 것도 비속어 논란이 반복되는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실무진이 준비한 자료를 그대로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 내용을 숙지한 뒤 메모를 보지 않고 말한다. 대통령의 말이 거칠다고 하지만 현장에서 들으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활자화됐을 때 간혹 이상하게 비칠 뿐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한 중진은 “대통령은 특정 장소에서 특정인 대상으로 얘기하더라도, ‘국민이 내 말을 어떻게 들을까’를 생각하며 말해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의 숙명이다”고 말했다.
비속어 사용에 대한 비판을 일종의 ‘트집 잡기’나 ‘박해’로 여기는 노 대통령의 자세도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그의 참모였던 한 인사는 “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자신의 ‘깽판’ 발언에 대해 언론과 야당에서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비판하자, 그 후부터는 일부러 ‘깽판’이란 말을 가는 곳마다 사용하고, 급기야 ‘양아치’라는 극단적 표현까지 썼다”며 “당시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청와대 소식지인 ‘청와대 브리핑’은 23일 노 대통령의 화법에 대해 “소탈함에서 묻어나는 수평적 리더십”이라며 “자신을 낮추는 겸양, 순발력 있는 애드리브(즉석발언), 의전과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엄숙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말투가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이승헌기자 ddr@donga.com
▼선생님께 야단맞은 학생 "막가자는 얘기지"▼
교육 전문가들은 최근 대통령을 비롯한 공인들이 정제되지 못한 언어를 양산해내는 데 대해 청소년 교육, 나아가 국민 교육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깽판’ ‘개판’ ‘양아치’ ‘시정잡배’ ‘∼못해먹겠다’는 등의 자극적인 언어가 자주 등장하면서 국민의 국어생활을 황폐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립국어연구원 최용기(崔溶奇) 학예연구관은 “언어는 단순히 의미 전달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을 보여주는 표현 방식이기도 하다”며 “그러나 현 정부 들어 고위 공직자들의 언어를 보면 과연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쓰는 말씨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최 연구관은 “공인들이 ‘내뱉는’ 품위 없는 언어가 청소년 정서는 물론 국민의 언어생활에도 나쁜 영향을 주는 만큼 되도록 표준어로,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유명 정치인들의 말투나 어법이 언론 보도에 그치지 않고 TV 오락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돼 청소년들에게 급속히 퍼짐으로써 확대 재생산되는 악순환을 가져온다는 지적이다.
또 특정 지역의 언어를 여과 없이 사용할 경우 지역감정의 요소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KBS 한국어연구회 회장인 이명용(李明鎔) 아나운서실장은 “최근의 언어습관은 된소리, 경음, 은어, 저속한 말을 써야 친밀감이나 결속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특히 정치인의 말을 패러디한 코미디 프로그램이 청소년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지만 청소년 교육에 악영향을 주는 만큼 고운 말을 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일선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정치인들이 쓰는 언어를 흉내내는게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 D중학교의 한 교사는 “수업 시간에 장난이 심한 학생을 교단으로 불러내 야단을 쳤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혼잣말로 ‘막 가자는 얘기지’라고 해 너무 당황했다”고 말했다.
서울 불광중 이근한 교사는 “신문 방송에 크게 보도된 ‘유명한 말’들을 아이들이 배우지 않을까 걱정하는 교사가 많다”며 “학교에서만 올바른 말을 사용하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언어습관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인철기자 inchu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