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수거를 위해 남극 부근에 도착한 필립스 자원봉사대원들. 사진제공 필립스
1995년 다국적 석유회사인 셸이 북해의 원유채취 플랫폼 ‘브렌트 스파(Brent Spar)’를 바다에 침몰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셸은 ‘브렌트 스파’를 육지로 끌어다 철거하는 대신 그냥 통째로 바다에 묻는 것이 가장 오염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소비자들의 강력한 불매 운동과 항의에 부닥쳤고 결국 계획은 백지화됐다.
이 사건은 셸이 기업을 둘러싼 환경과 경영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단순히 ‘성장과 이윤의 추구’라는 목표만으로 경영 활동을 하는 데 한계를 느끼게 된 것이다. 76년 만들어진 셸의 ‘경영 원칙(business principle)’에 인권(human rights)과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이 덧붙여진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브렌트 스파 사건이 21세기 기업에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전통적인 비즈니스 경쟁 논리가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대량생산의 시대에 기업은 좋은 품질의 상품을 적절한 가격에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 소비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품질과 가격 외에 기업이 제품을 ‘어떻게’ 만드느냐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유럽의 기업들은 이 같은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가장 큰 움직임은 지속가능성의 개념을 경제적인 것에서 생태적인 것으로, 다시 사회적인 것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셸에서는 이 같은 원리가 ‘3P’로 요약된다. 3P는 이윤(profit) 지구(planet) 인간(people)을 의미한다. 셸은 연례 경영보고서 외에 이 세 부문에서 셸의 활동을 소개한 ‘셸 리포트’를 매년 만들어 소비자에게 어필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전자업체인 필립스 역시 마찬가지다. 필립스는 98년 이후 환경 보고서를 발간해 왔지만 올해에는 이를 ‘지속가능성 보고서’로 대체했다. 필립스의 ‘지속가능성’ 역시 ‘경제적 환경적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기업은 자선단체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적당한 이윤을 지속적으로 창출하고 이를 주주들에게 돌려주면 그만 아닌가? 지속가능성의 개념을 환경으로, 다시 사회로 돌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은 동시에 추구될 수 있는 가치인가?
5일 네덜란드 헤이그 중심가 셸 본사에서 팀 반 쿠텐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의 직함은 ‘이슈 매니저’라는 매우 생소한 이름. 대외적으로 환경 문제에 대한 셸의 정책과 입장을 설명하고 관련된 일을 조율해 나가는 역할이다.
그에게 “한국 기업에선 경제적인 이윤 추구와 새로운 지속가능성 개념이 양립할 것인지 회의적인 경영자가 많다”고 하자 “구태의연한(old-fashioned) 발상”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쿠텐씨는 “외부 환경 변화의 속도와 셸의 투자 규모를 감안할 때 남보다 멀리보지 않으면 기업을 영위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아인트호벤에 있는 필립스 본사에서 만난 헹크 더 브루인 지속가능성 담당 부사장은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이 비즈니스 전략에서 중요하게 된 것은 기업 외부의 환경 변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린피스와 엠네스티 같은 비정부기구, 소비자, 투자자들이 바로 그가 언급한 ‘외부’의 이해(利害) 당사자들이다. 브루인 부사장은 어린이 근로자에 대한 노동 착취 문제가 불거졌던 나이키를 예로 들며 외부의 이해 당사자들이 기업의 관행을 아예 바꿔놓을 수 있는 세상이 왔다고 설명했다.
브루인 부사장은 지속가능성과 기업의 경제적 이윤 추구가 양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 금융계에선 ‘다우존스 지속가능성 지수’를 투자 판단을 위한 주요한 잣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 그는 “필립스의 경우에 친환경적 생산 공정을 도입하고 보니 전체 10분의 6 정도의 공정에서 비용이 줄어 들었다”고 소개했다.
기업을 둘러싼 경쟁의 룰이 바뀌어가는 중대한 시점에 서있는 것이다.
설명을 들으며 기자는 갑자기 답답해졌다. 필립스와 셸 방문에 앞서 만났던 국내 전자업계 유럽 환경규제조사단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유럽의 환경 규제가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에서 규제의 현황과 현지 기업의 대응책을 파악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하지만 그나마 국내 기업 가운데 참가한 곳은 삼성전자와 LG전자뿐, 나머지 기업들은 관심조차 없었다.
헤이그·아인트호벤(네덜란드)=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기업경영의 룰'이 바뀌고 있다 ▼
모든 경제활동의 궁극적 목적은 소비다. 자원 탐사도, 기술 혁신도, 생산도, 마케팅도 모두 인간의 소비 과정을 통해 그 가치를 실현한다. 경제 활동의 가치사슬을 크게 보면 지각에 흩어져 있는 가치 있는 자원과 생명체를 변형해 소비하고 쓰레기를 만들어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이다.
산업혁명 이후 이룩한 경제 발전도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면 쓰레기를 만드는 속도를 수십 수백배의 초고속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반면 자연이 순환체계에 의해 쓰레기를 다시 가치 있는 자원으로 재생하는 속도는 전혀 빨라지지 않았다.
결국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인류의 1만여년 문명사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향유했던 수준보다 나은 경제 활동 기회를 후손에게 물려주지 못하는 세대’로 기록될 위험에 직면해 있다.
‘지속가능한 개발’이란 다음 세대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할 수 있는 기회를 줄이지 않으면서 지금 우리 세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하는 방식의 경제 사회 개발방식을 말한다. 이를 위해 인구와 자원, 에너지, 환경과 같은 문제가 지구촌의 공동 관심사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보면 공공의 문제이며 정부와 국제기구의 몫이다.
지난해 열린 ‘지속가능 개발을 위한 세계 정상회의’에서는 리우 회의 이후 10년간 말과 토론은 많았지만 행동과 변화는 없었다는 반성이 지배적이었다. 이 회의에는 정부와 국제기구, 시민단체와 언론, 그리고 기업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들 가운데 누가 말을 하는 집단이고 누가 행동하는 집단인가? 이들 가운데 어느 그룹이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지식과 능력과 자원을 갖고 있는가?
21세기의 사회변화를 보면 공공부문의 영향력은 계속 줄어들고 있으며 기업은 세계화 과정을 통해 더욱 강력해져 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기업의 리더에게 더 많은 책임이 요구되며 이해 관계자의 기대 수준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기업을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사회 변화는 기업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도전이며 기회이자 위협이 된다. 세상은 기업을 향해 경제 활동의 과정이 지속가능성에 미치는 영향, 즉 사회적 형평성과 환경 생태적 영향, 그리고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세 가지 지표에 대해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기업 경영의 성적은 이 세 가지 성과 지표로 평가될 것이다.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가능한 수익성을 위한 경쟁우위를 추구해온 기업의 리더들은 이제 또 다른 지속가능한 세계로의 여정에서 어떻게 경쟁우위를 확보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승규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 skrhee@kgsm.kaist.ac.kr
▽팀장=허승호 경제부 차장
▽팀원=김용기 신연수 이강운 공종식 정미경 박중현 김두영
홍석민 기자(이상 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