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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민칼럼]표변과 변덕

입력 | 2003-05-26 18:24:00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전후해 불거지기 시작한 사회적 갈등들 때문에 진저리를 치고 있다. 노사분규 현장과 반정부 시위를 토양삼아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온 노 대통령이지만 막상 권력의 정상에 오른 뒤에는 자신의 성장배경이었던 바로 그 집단행동들 때문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쏟은 정성이 배신이나 무효로 돌아올 때 어떻게 해야 하나” 한탄을 할 정도인가.

요즘 노 대통령은 흡사 줄을 흔들어대며 아우성치는 극성관객들 위를 이제 몇 걸음 건너기 시작한 외줄타기 곡예사의 심정일지 모른다. 줄 끝까지 다 건너기 전에는 내려갈 수도 없고 후보 시절과 달리 몸을 좌우 어느 쪽으로도 기울일 수 없는 것이 대통령 자리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불과 3개월, 감격과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실패한 대통령이 될까 위기감을 느껴야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과거와는 사뭇 다른 盧대통령 ▼

이렇듯 대통령이 되기보다 제대로 하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건국 이후 많은 대통령의 등장부터 퇴장까지의 과정이 말해준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그는 백성들의 수준이 낮을 때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화려한 경력에 힘입어 대통령에 ‘영입’된 인물이지만 바로 그 경력이 낳은 독선 때문에 국민을 낮춰보다가 마침내 권좌에서 쫓겨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탱크와 총검을 앞세워 권력을 차지한 박정희, 전두환 두 대통령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더 큰 무력에 의존해야만 했다. 집권 과정부터 비정상적이었던 두 사람은 결국 내부반란자의 총탄에 스러지거나 아니면 무력통치의 대상이었던 국민에 의해 임기 후 죄수의 몸이 되는 수모를 겪었다.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은 야당지도자로서 오랜 기간 반독재투쟁을 이끌며 결속된 지지세력을 바탕으로 집권했으나 투쟁에만 익숙했던 무능력 때문에, 그리고 지지 세력의 우두머리들이었던 가신과 측근들의 비리 때문에 각각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노 대통령은 청문회를 통해 입증된 천부적 말솜씨와 ‘노사모’로 대표되는 젊은 지지세력을 발판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오늘날 노 대통령은 바로 그 두 가지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집권 후 몇 차례 중요한 사안에서 노 대통령의 결정은 지지계층을 뒤바꿀 만큼 지극히 현실적인 방향으로 변했다. 이라크 파병과 특별검사제 도입, 그리고 한미정상회담과 전교조 사태 등등에서 나타난 노 대통령의 말은 후보시절 그의 철학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은 대통령이 된 다음에 생각이 획기적으로 바뀌었든지, 또는 후보시절 집권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다른 다중의 논리를 주장했던 것뿐인지, 아니면 속은 그대로면서 겉으로만 변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여하튼 우리는 그 결과 요즘 믿기 어려운 모습을 목격하게 됐다. 대통령을 여당이 비난하고 야당이 두둔하는가 하면 대선 때 ‘그가 집권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던 계층이 지지하고 ‘그를 심부름꾼으로 뽑아 사회개혁의 뜻을 이루겠다’던 세력들은 돌아서서 험하게 비판해대고 있는 것이다.

▼허물 고치기와 변덕은 달라 ▼

과거 우리나라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일부 특정지역 유권자들은 ‘어떤 말이냐’보다 ‘누구의 말이냐’에 따라 맹신적으로 찬성과 반대를 결정하는 데 익숙해 왔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는 노 대통령 한 사람을 놓고 그의 말 내용에 따라 이성적으로 찬반이 갈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노사모’가 요즘 ‘노무현에게 사기당한 사람들의 모임’이 됐다고 분개할지 모르지만 지금 나라 안팎의 상황을 본다면 방미를 계기로 바뀐 노 대통령의 말은 존중되는 것이 옳다.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는 표변한다’고 했다. 허물을 고쳐 언행이 전과 뚜렷이 달라지는 행동에 대한 칭찬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바뀌면 그것은 변덕이지 표변이 아니다. 노 대통령의 변신이 ‘표변’으로 평가되고, 그래서 그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지금부터 말을 또 한번 바꾸고 싶은 유혹과 과거 지지세력의 무분별한 요구로부터 초월해야 한다. 그때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은 사라질 것이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