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의 명문사립 Y대를 졸업한 강모씨(28). 취업지망생이던 그는 최근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강씨는 부모님의 체면을 고려해 그동안 ‘보기에 그럴듯한 직장’ 찾기에 매달렸다. 대기업 공기업 금융기업 등에 원서를 넣었다가 번번이 실패한 것. 올해 들어서는 대기업 가짜 명함을 만들고 집에서는 출근하는 척하며 일자리를 찾아다녔으나 결국 직장을 못 구해 중압감에 시달려 왔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말이다.
▽청년실업과 ‘사오정’=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취업 스트레스는 강씨 사례뿐이 아니다. 최근 140명을 뽑는 대우건설 신입사원 모집에는 30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그나마 공개모집을 하지 않았기에 이 정도에 그친 것.
▼연재물 목록▼
- 투자 안하는 경제
- 벤처 희망은 없나
- 고비 맞은 중소기업
- 위기의 수출산업
남기혁 대우건설 이사는 “공개모집을 하면 수백 대 1의 경쟁이 벌어진다”며 “이들을 가려내는 시간과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학교추천 형식으로 모집했다”고 말했다. 이번 지원자들은 영어 토익 800점이 평균이고, 둘 중 하나는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대입재수 1년, 취업준비 1년은 기본이라는 뜻에서 대학가에서는 ‘고(高)4 대(大)5’라는 말이 관용어가 된 지 오래다.
올 3월의 전체 실업률은 3.6%, 실업자는 80만7000명. 이 가운데 20대(20∼29세) 청년 실업률은 8.0%, 실업자는 37만5000명이었다. 전체 실업자 2.2명 가운데 1명이 20대 청년이다.
직장인 조퇴조로(早退早老) 현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오죽했으면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에 이어 ‘육이오’(62세까지 일하면 오적·五賊)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을까. 올해 초 이뤄진 삼성그룹의 임원 승진자 평균나이는 45.9세. 전체 임원에서 40대가 차지하는 비율도 지난해 59%에서 67%로 크게 높아졌다. LG그룹과 SK그룹의 임원 승진자 평균연령도 44세였다. 보수적인 은행들도 대체로 50대 초반을 넘지 않는다.
경력직의 재취업은 더 어렵다. 외환위기 이후 해고위협은 상시화됐지만 재취업 노동력과 고용주가 만나는 ‘2차 노동시장’이 형성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눈높이 조절’ 실패에 구조조정 문제까지=고용이 안 되는 것은 우선 경기가 나쁘기 때문이다. 올해 1·4분기 경제성장률이 3.7%로 추락했다. 노동부 김인곤(金仁坤) 고용지원과장은 “이 정도의 성장률이면 새로 노동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대졸자들을 흡수하는 데만도 20여만개의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취업 눈높이 문제도 있다. 인천 서구 가좌동에 있는 중소업체 ㈜ESC의 고형래 사장은 “노동부 전산망에 인력모집 공고를 내고 일간지 광고까지 냈지만 결국 현장직원을 구하지 못했다”며 “견디다 못해 작년 말 중국 상하이(上海)에 현지공장을 세웠다”고 말했다.
취업컨설팅회사인 IBK 문형진 이사는 “일부 대졸자들은 월급 50만원만 줘도 좋으니 여행사 유통업체 보험회사처럼 ‘서울에 있는 폼 나는’ 회사를 소개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중소 제조업체엔 보수가 많아도 안 가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청년실업과 중소기업 인력난이 공존하는 원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청년들이 중소 제조업체에 가지 않으려는 것은 ‘폼이 안 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장 돈을 버는 일이 가장 중요한 외국인 노동자와는 처한 여건이 다른 것.
구조조정과 고용의 관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1991∼2001년 제조업은 연평균 7.8%씩 성장했는데도 이 분야 고용은 오히려 82만7000명이 줄었다. 자동화에 따른 인력절감 효과가 성장의 고용창출 효과보다 컸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경제성장률이 1% 성장할 때 △서비스업 6만3400명 △건설업 1500명씩 고용이 늘었지만 △제조업 1만1100명 △농림어업 4만1500명 △전기·가스·수도업 100명 감소했다. 따라서 앞으로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제조업에서는 일자리가 거의 생기지 않는다는 게 재정경제부의 분석.
박병원(朴炳元) 재경부 경제정책국장은 “과감한 규제완화로 지식산업 위주의 서비스산업을 적극 육성하는 게 경제수준을 한 단계 올리면서 실업문제도 해결하는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말했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인천=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
▼"대졸자들 취업 눈높이 낮춰야"▼
‘대학졸업생은 갈수록 늘어만 가는데, 그들이 원하는 일자리는 오히려 줄고 있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이 내놓은 ‘청년층 실업현황과 정책과제’ 보고서에서 지적한 청년층 실업문제의 핵심이다.
1995년 전문대를 포함한 대졸자 수는 32만4000명. 7년 후인 2002년에는 48만4000명으로 16만명이나 늘었다.
반면 대졸자들이 주로 취업하기 원하는 △30대 대기업계열사 △금융기업 △공기업 등 이른바 ‘그럴듯한 일자리’는 최근 4년 동안 29만개나 줄었다.
이들 ‘그럴듯한 일자리’의 채용관행도 크게 바뀌었다. 신규 채용 대(對) 경력직 채용의 비율이 외환위기 이전인 96년에는 65% 대 35%였으나 2001년에는 34% 대 76%로 역전된 것.
지난해 인문계 고등학생의 대학진학률은 87%. 1970년 고교진학률이 70%였으니 이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거칠지만 ‘학벌 석차’로 따져보면 70년대 고졸자 수준이 안 되는 대졸자가 노동시장에 많이 있다는 분석이다. 산업과 기업채용의 구조적인 변화에 대학졸업이라는 ‘취업기대 인플레’ 요인까지 겹쳐 대졸 청년층 실업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셈.
반면 중소기업은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다. 중소기업청이 조사한 ‘올 1·4분기 중소기업 인력부족 현황’에 따르면 중소제조업에서 부족한 인력은 19만6575명. 부족인원을 적정인원으로 나눈 인력부족률은 8.9%다. 불법체류자까지 포함한 외국인 근로자가 30만명이 넘게 한국의 노동시장에 들어와 있는데도 거의 10명 중 1명꼴로 항상 일손이 모자란다.
최근 경기활성화 차원에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추가경정예산(추경)에 청년실업 관련 예산이 집중적으로 포함될 예정이다. 연수지원제, 직장체험프로그램, 직업훈련 등이 활성화된다.
기획예산처 당국자는 “이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청년들은 실업자 통계에서 빠져 단기적으로 실업률 수치를 낮추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다”며 “그러나 통계왜곡은 결국 노동시장 정상화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인수(鄭寅樹)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청년실업 문제가 해결되려면 대졸자들이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으로 가도록 유도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실업자가 자신의 수준에 맞는 기업을 찾고, 기업도 적합한 인력을 구할 수 있는 고용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인천 남동공단 "한국인 현장직원 채용 포기"▼
“현장에서 일하겠다는 젊은 사람을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어요. 어쩔 수 없이 불법 체류 외국인 근로자를 써가며 생산라인을 돌리고 있지요.”
인천 남동공단에서 제강용 첨가제(添加劑)를 생산하는 T업체의 H사장(50)은 올해를 시작하면서 굳게 결심한 것이 한 가지 있다. ‘한국인 채용에 미련을 버리자’는 것.
이 회사에서 일하는 현장 직원 17명 가운데 10명이 불법 체류 외국인 근로자이다. 이 가운데 4명은 지난해 말과 올 초에 데리고 왔다.
3년 전부터 생활정보지와 일간지 광고,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 등록, 구청 취업알선과 구인등록, 채용박람회 참가 등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현장 직원을 채용하는 데 실패했다.
“구인광고를 내면 20, 30대 젊은층이 찾아오지만 생산 현장을 보고 나면 꽁무니를 빼버려요.”
생산직 초임 급여는 140여만원(잔업수당 포함). 여기에 상여금 300%가 지급돼 같은 업종에 비해 적지 않지만 일하겠다는 사람은 없다. 직원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전철역에서 회사를 오가는 소형 버스를 운행하는 것도 큰 효과를 못보고 있다.
H사장은 “인력난과 인건비 상승이 겹칠 때면 사업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며 “설비와 연구개발 투자 등을 마음대로 못할 때면 이러다 경쟁력 상실로 이어지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남동공단 중소업체의 신규 취업자 가운데 생산직에서 일하는 20, 30대는 찾기가 쉽지 않다.3700여개 중소기업이 몰려 있는 인천 남동공단은 현재 70%에 이르는 업체가 생산기술직 부문에서 인력난을 겪고 있다.
일부 업체에서는 생산직 주부사원이라도 구하기 위해 일손을 데려오는 직원에게 20만원의 보너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인천상공회의소 민태운 경제통상팀장(43)은 “정부가 엉뚱한 데 실업예산을 쓸 게 아니라 실업자들이 생산직으로 갈 수 있도록 기업 환경을 바꾸는 데 투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천=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
▼특별취재팀▼
▽팀장=허승호(경제부 차장)
▽팀원=신연수 임규진 김광현 김태한 황재성 이헌진(이상 경제부)
정용균 강정훈 조용휘 정승호 지명훈(이상 사회1부)
김상철 차준호 남경현(이상 사회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