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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공동체 살리기]보령 청라면 협업농가

입력 | 2003-05-28 17:42:00

충남 보령시 청라면 성주산 기슭의 냉풍 양송이재배단지에서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어울려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보령=이기진기자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의 첫 구절을 떠오르게 하는 곳이 보령시에 있다. 바로 성주터널이다. 시내와 성주면을 관통하는 성주터널을 지나면 흡사 속세에서 선계로 들어선 듯 새롭다. 한없이 펼쳐질 것 같던 바다가 홀연 사라지고 심심산골로 접어든 듯 어깨를 잇댄 산들이 울울하다….”

충남 보령시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는 성인(聖人)들이 많이 살았다 해서 이름이 붙여진 성주산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산이 껴안고 있는 곳이 바로 청라면이다. 이곳은 1980년대 후반만 해도 검은 석탄 먼지 투성이였다. 단일 광산으로는 국내 두 번째 매장량을 자랑하며 개발의 기계음이 진동했던 곳이다.

▼연재물 목록▼

- 애향운동 성공모델 '울산사랑'
-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 전남 강진군 옴천면
- 충남 강경의 '지역살리기 교과서'
- 교육기금 모으는 경북 군위 주민들

청라면은 인근 미산 성주면과 전국 최대의 탄광벨트를 형성하며 대천해수욕장과 함께 이 지역 경제를 견인했다. 당시 지역 총생산은 다른 도시 지역 못지않게 높았고 행정구역상 면에 불과했지만 청라면의 인구는 1만3000여명에 달했다.

폐갱구에서 나오는 냉풍을 이용해 재배한 양송이를 수확하고 있다.-보령=이기진기자

하지만 80년대 후반 석탄합리화 정책에 의해 하나 둘씩 폐광되면서 이곳의 영화(榮華)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인구도 과거의 3분의 1인 5600여명으로 줄었다.

10여년이 지난 뒤인 2003년 5월 현재.

성주산 기슭, 녹슬어 버린 150여개의 갱구에서 양송이가 소담스럽게 자라면서 다 스러져 갈 것 같던 청라면에 기계음 대신, 청량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자연적으로 나오는 냉풍과 냉수가 양송이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주고 있는 것. 한 마을 주민은 “석탄이 ‘검은 진주’라면 이제는 ‘하얀 진주’ 양송이가 청라면의 보석”이라고 말했다.

청천저수지를 지나 청보초등학교에 못 미쳐 오른쪽 샛길을 따라 성주산 중턱까지 오르면 한 여름에만 1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간다는 ‘할매농원’이 나타난다.

폐갱구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자연냉풍’을 파이프라인으로 옮겨 양송이를 키우면서 한쪽에는 이를 이용한 풍욕(風浴)장이 꾸며져 있다.

대표인 한창규(韓昌奎·57)씨는 “양송이 덕분에 자식 4명을 모두 시집 장가보내고 취직도 시켰다”며 “이제 연간 소득 4000만원은 나와 마누라의 몫이 되었다”며 밝게 웃었다.

청라면의 변신은 1993년 보령시가 폐광의 재활용 방안을 고심한 끝에 나온 ‘작품’이었다. “폐갱구에서 나오는 냉풍과 섭씨 12∼14도를 유지하는 물을 이용하면 양송이 재배에 성공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출발점. 보령시 농업기술센터 김영운(金榮雲·49) 경제작물담당 계장은 당시 공주와 강원 지역의 버섯재배단지를 벤치마킹하며 폐광 재생(再生)플랜을 짜냈고 보령시의 지원도 적극적으로 이끌어냈다. 폐갱구의 냉풍을 ‘유도’해 기슭에서 양송이를 재배하는 방법도 보령시가 개발한 특허기술. 시는 양송이 재배를 원하는 297개 농가에 11억원의 시설비를 저리 융자했다. 이는 전체 시설비 17억여원의 65%에 해당한다.

주민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한씨의 경우도 폐광 이후 농사를 짓다가 양송이 재배에 뛰어들었다. 청라면에서 태어난 그는 이곳의 역사를 몸으로 겪어왔다. 21세 때인 1967년 성주산 기슭에 최대 길이 4km의 갱구를 지닌 영보탄광 대본갱에 입사했고, 이곳이 폐광되던 88년까지 21년간 무연탄 캐는 일을 해 왔다.

양송이 재배는 주민들간의 ‘협업’에 의해 이뤄지면서 시너지효과를 보았다. 청라면이 지역 공동체 살리기의 모범사례로 평가받는 대목이다. 이는 보령시와 주민들이 ‘전통과 예절’을 지역 살리기의 모토로 삼고 있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60평짜리 4개 동에서 양송이를 재배중인 한씨도 이웃과의 품앗이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강찬석(姜贊錫·청라면 의평리)씨와 한희구(韓熙九·51)씨는 그의 친구이면서 양송이 재배의 영원한 파트너다. 입상(볏집들이기)와 종균접종, 폐상(볏집내기) 때에는 강씨와 한씨가 여지없이 찾아오고, 강씨가 바쁠 때는 한씨 역시 빠지지 않는다. 한씨가 연간 수확하는 양송이는 42t에 달한다.

청라면에서 생산되는 양송이는 대부분 농협을 통해 계통출하되지만 중부물류센터, 경기 성남시 하나로마트, 광주 제일유통에도 직접 출하된다. 품질을 객관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다.

보령시에서 현재 양송이 재배를 하고 있는 농가는 청라면 51곳을 포함해 모두 297곳. 이 때문에 성주산 서쪽 해발 200∼400m 기슭은 빽빽이 들어선 양송이 재배 하우스로 ‘눈 덮인 산’처럼 온통 하얗다. 주민들은 지난해 양송이 재배로 한 해 총 53억원, 가구당 평균 4000만원씩의 소득을 올렸다.

주민들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년 전 탄생한 ‘보령시 양송이 연구회’가 대표적이다. 회원은 22명에 불과하지만 2개월에 한 번씩 만나 양송이 재배기술을 토론하고 타지역 견학을 번갈아 하며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이 연구회 회장 이희영(李喜永·54)씨는 “과습(過濕)이 양송이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각 농가에 전하기도 했고, 적정 가격을 받기 위한 출하 방안 연구도 꾸준히 벌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양송이 고급화와 차별화 전략도 관심사항이다. 생산한 양송이를 등급별로 분류해 다양한 소비계층을 품질별로 공략하고 ‘최고급 버섯’을 재배해 고급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청라면 주민들은 이와 함께 ‘평온한 휴식공간’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4km에 이르는 우거진 숲과 맑은 물이 감도는 성주산을 적극 홍보하면서 관광자원화하겠다는 것. 해수욕장에서 차로 불과 20여분 거리에 있어 이와 연계된 관광프로그램도 모색하고 있다.

이시우(李時雨) 보령시장은 “청라면의 성공은 최악의 위기를 오히려 변화의 계기로 삼은 모범 중의 모범”이라며 “경제뿐 아니라 자연과 인심을 한데 묶는 지역공동체 살리기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보령=이기진기자 doyoce@donga.com

●보령 청라면은…

충남 보령시 북동부에 위치한 청라면은 11개 이(里)로 이루어져 있다.동쪽은 청양군 화성면과 남양면,

서쪽은 보령시 주포면, 남쪽은 보령시 성주면과 접해 있다. 해발 680m의 성주산 기슭에 마을이 밀집되어 있으며 남서쪽으로

청천저수지를 비롯해 많은 관개시설이 갖춰져 있어 논농사가 주 산업이다. 백제 때 신촌현, 통일신라시대 때 웅천주 결성현, 고려 때 보령현이던 것이 고종 32년부터 청라로 불려 왔다. 청라면이 등을 기대고 있는 성주산은 오서산과 함께 보령을 상징하는 명산으로 질 좋은 소나무를 비롯해 느티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때죽나무 고로쇠나무 등이 자생하며 한낮에도 컴컴할 정도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성주산 화장골에는 모란형의 명당 8개소(성주 8묘) 중 하나가 감추어져 있다고 알려져 명당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잦다. 1980년대 이전에는 나원리와 의평리 소양리 일대가 석탄산업으로 활성화됐다.한때 금 은이 채취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두 폐광된 상태. 문화재로는 남포(藍浦)벼루, 화암서원(花巖書院·충남문화재자료 138호), 보령 향천리(香泉里) 성터 등이 있다. ‘관촌수필’의 작가 고 이문구(李文求)씨, 김각영(金珏泳) 전 검찰총장이 이곳 출신이다.

●‘벼루名匠’ 김진한-성수 父子

4대째 벼루만들기 가업을 이어받으며 ‘지방 전통잇기’에 나서고 있는 김진한씨(왼쪽)와 아들 성수씨.-보령=이기진기자

충남 보령시 청라면 소재지에 이르면 도로변에 ‘대한민국 명장 김진한(연 무형문화재 제 6호)’이라는 석공 안내판이 눈에 띈다. 60년 동안 남포석을 이용해 벼루를 제작해 온 김진한(金鎭漢·64)씨의 벼루공장인 ‘한진공예’가 있는 곳이다.

이곳의 명칭은 머지않아 바뀔지도 모른다. 김진한씨의 아들이 4대째 가업을 이어 ‘벼루 명장’의 길로 나섰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아들 성수(成洙·31)씨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준비를 하다 2000년 7월 고향 청라면으로 내려왔다.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것이 고향사랑”이라는 아버지의 충고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성수씨는 명지대 산업대학원 전통공예학과에 입학했다. 경험에 의존해 가업을 전수하기보다는 이론적 실험적으로 ‘연구’하며 발전시키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성수씨는 현재 규격절단 단계를 넘어서 조각단계에 이르는 등 명장의 길을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최근에는 벼루에 옻칠을 하는 새로운 기법까지 개발하는 등 벼루 현대화에도 결실을 보고 있다.

성수씨는 “고조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기법에 현대화된 기술을 적용해 한국의 대표적인 벼루를 만들고 더 나아가 세계적인 명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 김씨는 자신의 작품을 진열해 놓은 전시장을 최근 박물관으로 개조하고 있다.

“벼루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의외로 많아요. 관광버스가 들이닥치면 학생들이 제대로 관람도 못하고 해서 벼루 만드는 과정을 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하려고요.”

작업장 옆에는 향토관도 짓고 있다. 청라면의 전통문화재인 벼루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다. 조부 때부터 전통 남포벼루를 만들어 왔으니 김씨가 3대째다. 인근 성주산에서 캐어온 벼루 원석인 남포석은 김씨의 공장에서 규격절단-갈기(밀링)-물집파기-조각 등의 과정을 거쳐 작품으로 완성된다. 특히 부친 김갑용씨에게서 전수한 그의 전통적인 조각 솜씨는 96년 그를 석공예분야 대한민국명장으로 만들었다. 매화와 새를 조각한 양각 매조연(梅鳥硯), 송죽매연(松竹梅硯), 자연송월학연(自然松月鶴硯) 등은 그의 수작으로 꼽힌다. 컴퓨터 시대에도 벼루를 고집하고 있는 부자의 꿈은 “성주산처럼 묵묵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보령=이기진기자 doyoc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