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이유라가 뉴욕필의 메모리얼 데이 특별콘서트에서 로린 마젤 지휘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 뒤 관객들의 갈채에 답하고 있다. -뉴욕=유윤종기자
미국의 현충일인 5월의 마지막 월요일. 뉴요커들에게 이날은 보통 공식적인 휴가시즌이 시작되는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슬비가 내린 올해 이 날(26일)의 표정은 예년과 사뭇 달랐다. 9·11 테러 후 두 차례의 대외전쟁을 성공으로 이끈 미국인들은 각종 매체의 특집광고 등을 통해 전장에서 숨진 유무명의 전쟁용사에게 추모의 정을 표현했다. 세계무역센터가 서있던 자리인 ‘그라운드 제로’에도 희생자를 추모하는 인파가 빗속에 하루 종일 이어졌다.
이날 뉴욕 맨해튼의 성 요한 성당에서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12년째 주최하는 ‘메모리얼 데이 기념콘서트’ 가 열렸다. 2000여명의 시민이 관람하고 주요 방송이 뉴스시간에 소개한 이날 콘서트의 스포트라이트는 단연 이날 처음 뉴욕필과 협연하는 17세의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유라(인디애나음대)에게 쏠렸다.
협연곡은 콘서트 첫 순서로 마련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협주곡 D장조. 관현악의 서주(序奏)에 이어 이유라의 활이 첫 소절을 힘차게 내리긋는 순간 객석의 긴장은 잔잔한 탄성으로 변했다. 낭랑한 음색으로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그의 연주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19세기 ‘거장적 협주곡’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어려운 기교의 이 작품을 이유라는 익숙한 솜씨로 요리했다. 느릿한 2악장에서 길고 유연한 호흡으로 관객을 쥐었다놓았다 한 그는 빠른 마지막 악장을 분수가 솟구치는 듯한 활력과 날렵한 기교로 장식했다. 그의 활 끝이 마지막으로 허공을 찌르는 순간 객석에서는 ‘브라보’라는 함성이 곳곳에서 터졌다. 객석은 열렬한 기립박수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의 뉴욕필 데뷔를 축하했다.
이유가(가운데)가 연주를 마친 뒤 무대 뒤에서 박성용 금호명예회장(왼쪽) 부부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뉴욕=유윤종기자
이유라는 이날 연주를 시작으로 7월까지 뉴욕필의 4개 연주회에 협연자로 나선다.
이날의 지휘자이자 지난해 인디애나음대에 들러 그의 연주를 들은 뒤 직접 협연자로 결정한 뉴욕필의 음악감독 로린 마젤은 연주 뒤 “이유라는 매우 영리한 연주자다. 빈틈없고 지적인 연주를 펼치며 주춤거리거나 주저함이 없이 모든 것을 표현한다. 한마디로 대만족”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연주를 지켜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유라는 자기 나이에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이뤄냈다. 2∼3년간 자기를 잘 관리한다면 흔들림 없는 대가로서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유라는 9세 때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유학했으며 바이올린 명교사 도로시 딜레이의 ‘숨은 마지막 무기’로 평가돼 왔다. 12세 때 세계적 매니지먼트사인 ICM과 전속계약을 하고 볼티모어심포니, 클리블랜드심포니, 워싱턴내셔널오케스트라 등 세계적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면서 다음 세대 바이올린계의 대표주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올 시즌에는 미국과 유럽의 7개 도시 순회 독주회를 펼치며 활동영역을 더욱 넓혔다.
그는 “작품의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는 마젤이 편안하게 받쳐줘 즐겁게 연주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협연 소감을 말했다.
줄리아드 예비학교 진학 시절부터 이유라를 뒷받침하고 있는 금호그룹 박성용 명예회장은 “연주자로서의 성장에 중요한 시기임을 감안해 6월 보스턴 뉴잉글랜드음대로 학교를 옮기는 그에게 3년간 연 1만8000달러의 장학금과 항공권 제공 등 지원을 확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뉴욕=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