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교수는 “미국 민주주의 형사법을 토착화하는 것이 학자로서의 나의 임무”라며 “형사법의 문제점을 합리적으로 지적해 판결을 바꾸고 입법과 행정기관을 움직이고 싶다”고 밝혔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서울대 법대 조국(曺國·38) 교수는 2001년 12월 모교에 임용될 때부터 화제를 모았다. 1993년 울산대 재직 시절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도왔다는 이유(국가보안법 위반)로 5개월 넘게 옥고를 치른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전과자’를 보수 성향의 국립대에서 ‘법대 교수’로 임용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형사법에 내포된 남성 편향주의를 지적하는 ‘형사법의 성(性) 편향’이라는 책을 펴내 법조계와 여성계에서 주목하고 있다. 조 교수가 주장하는 내용은 대충 이렇다.
여성이 섹스에 대해 ‘No’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말 ‘No’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는 어떠한 관용도 있을 수 없다, 아내 강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내의 몸과 성을 남편의 소유물로 보는 남성 중심적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국립대 남자 교수가, 그것도 경상도 출신에 정성껏 제사를 지내는 장남이, 이름도 ‘큰 일’ 하라는 뜻에서 나라 ‘국(國)’자를 쓰는 사람이 첫 법학 연구서를 쓰면서 왜 화두를 여성으로 잡았을까.
사회적 현안에 대해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젊고 잘생긴 교수가 앞으로 어떠한 정치적 행보를 보일지에 대해 이런 저런 소문이 돌던 차였다.
● 여성과 법
- 언제부터 이 주제에 관심을 가졌나.
“여성 운동단체가 형법을 공격하는 계기가 된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강간범의 혀를 잘라 자신을 방어한 주부에게 ‘과잉방위’라는 이유로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됐던 1988년의 변월수씨 사건, 9세에 성폭행 당한 후 정신분열,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시달리다 21년만에 가해자를 찾아가 살해한 1991년의 김부남씨 사건, 자신을 13년간 강간해온 의붓 아버지를 살해한 1992년 김보은씨 사건 등이다. 형법 속에 존재하는 남성편향을 연구하는 계기가 됐다.”
- 사회적 주류에 속하는 학자가 첫 전공서에서 비주류의 문제를 다룬 것은 뜻밖이다.
“이는 형사법의 변두리 주제가 아니다. 1980년대 미국 영국 독일 등에서 학문적 논의나 법원 판결의 주요 주제는 여성주의였다. 이때 형사법의 대대적 개혁 대상이 바로 성 편향적 조항들이었다. 우리 형법 교과서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 듣고 보니 강간, 성폭행, 가정 폭력 등이 이슈로 자주 부각됐던 것 같다.
“1987년을 기점으로 정치적 억압 기제가 풀리면서 참고 살던 여성 동성애자 어린이 등 소수자들의 반란이 시작됐다. 여성의 반란은 강간범을 적극 고소하고 때리는 남편을 살해하거나 바람을 피워 간통죄로 고소당하는 식으로 표현됐다. 세상은 민주화되고 권리 의식도 높아졌는데 남녀간 관계를 다루는 법적 시스템은 제자리걸음이다.”
● 미국과 법
조 교수는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법학박사로 영국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았다. 형사법 전공자로는 영미권에서 학위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 다른 분야는 시쳇말로 발에 차이는 것이 미국 박사인데….
“우리 법체계가 독일의 대륙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형법 1세대는 일본에서 공부했고 2세대는 독일에서 공부했다. 3세대는 한국 모델의 형법학을 세울 임무가 있다. 독일과 일본의 법체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영미의 법체계가 필요하다.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 때 이수성 지도교수님이 미국으로 가라고 권유하셨다. 내가 이 교수님의 마지막 방돌이(연구실 조교)다.”
- 글로벌 스탠더드 정립이 진행 중이고 이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법조계는.
“마찬가지다. 국제법과 상법은 이미 미국화됐고 형사법도 미국 법체계를 따르는 추세다.”
- 국력 때문인가, 미국 법체계가 선진적이기 때문인가.
“자본의 힘이나 국력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법학에서는 미국식 논리가 보편성을 담고 있는 부분이 있다. 미국에서는 민권운동이 활발하던 1960년대 연방대법원이 주도해 형사법 혁명이 일어났다. 죄인의 인권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이 세계화됐듯이 미국의 형사법 혁명도 세계화가 진행 중이다. 미국의 형사법 혁명은 법체계에서의 프랑스 혁명이다.”
- 미국이 국제적으로 욕도 먹고 있다. 국내 일부 젊은이 사이에 반미정서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고….
“미국을 미워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한미행정협정(소파)에 문제가 있다. 하지만 양국간 규정은 힘의 관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이 동티모르와 맺고 있는 소파는 훨씬 불평등하다. 주한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당장이냐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감각의 균형이 중요하다.”
● 양심수와 법
조 교수는 사노맹 사건 때문에 국제사면위원회로부터 ‘양심수’로 선정된 바 있다. 그가 형법을 연구하게 된 배경에는 고교(부산 혜광고)와 대학 후배인 고 박종철씨가 있다. 참고인 자격으로 끌려가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한 후배를 보며 형사법의 존재를 처음 경험했다. 그의 이력에 비춰 ‘친미(親美)적’ 발언은 의외였다.
- 학생 운동을 하던 때와 달리 보수적으로 변한 것 같다.
“친미가 보수는 아니다. 학생에게는 설익은 주장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논거 없는 주장은 할 수 없다. 구호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프로페셔널리즘의 세계가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이 방미 이후 시각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지지층 일부는 불만이다.
“노 대통령의 변신은 불가피한 점이 있다. 그는 국정 운영의 총책임자다. 운동의 논리와 국가운영의 논리는 다르다. 흔히 교수 출신이 장관이 되면 말을 바꾼다고들 비난한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성인(聖人)은 1000년 앞을 내다보고 학자는 10년, 20년 앞을 본다. 하지만 장관은 이 순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다.”
- 그렇다면 보수든 진보든 차이가 없지 않은가.
“방향성이 다르다. 보수는 과거의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하고 진보는 미래의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전히 진보적이다.”
-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참여연대는 낙선운동을 주도했었다. 법을 어겨도 되나.
“법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위헌적 법률에 대해서는 시스템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비판할 수 있다. 법개정 운동이나 입법 청원, 일인시위 등의 합법적 방법이 있다. 극단적으로는 낙선 운동과 같은 시민불복종 운동이 있는데 이는 법을 어기되 결과는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 법은 보수적인 것인가.
“법은 야누스다. 보수적이면서 진보적이다. 법은 권리와 의무 관계를 규정하는데 의무를 강요하는 측면에서는 보수적이지만 권리주장을 수용하는 측면에서는 진보적이다. 법은 지키라고 구속하지만 동시에 권리를 주장하라고 허용함으로써 법에 대한 도전을 인정한다.”
● “첫사랑과 운좋게 결혼”
- 책 머리말에 ‘관악에서 그 너머를 응시하며’라고 썼는데….
“형사법은 현실과 긴밀한 교감이 요구된다. 현실로 향한 촉각을 잃지 말자는 의미에서 그런 표현을 썼다.
- 정치를 하겠다는 뜻인가.
“그럴 의사도 능력도 없다. 학자로서 한판 인생을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
- 386 운동권 출신인데다 외모도 수려하다. 이러한 ‘상품성’ 때문에 출마설이 끊이지 않는다.
“사실 외모가 컴플렉스다. 대학 때 여학생들에게 많이 시달렸다. 아차 하다가 제비 소리 들을까 봐 여성에 경계심을 가지고 산다. 외모로 먹고 사는 직업이 아닌데…. 학문으로 평가받고 싶다.”
-결혼은….
“대학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첫 사랑과 운좋게 결혼했다.”
-이름이 특이하다.
“할아버지께서 늘 ‘이름값 하라’고 하셨다. 내 그릇에 비해 이름이 너무 크고 무거워 늘 눌려 지내는 느낌이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