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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올 여름 극장가 한국영화 화두는…'우아한 공포'

입력 | 2003-05-29 19:42:00



《공포 영화의 계절이 돌아왔다. 올해 여름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 공포영화는 ‘장화, 홍련’ ‘4인용 식탁’ ‘거울 속으로’ ‘아카시아’ ‘여우계단: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등 다섯편. 2001년 여름(6∼8월)에는 2편(‘소름’ ‘세이 예스’),

2002년 같은 기간에는 겨우 1편(‘폰’)이었던 것에 비하면 크게 늘어났다.》

# 왜 공포영화가 많은가?

지난해 여름 공포 영화 ‘폰’은 국내 영화계의 시선을 공포물로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폰’은 17억원의 ‘저예산’으로 만들어졌지만 전국 관객 220만명을 동원했다. 이에따라 지난해 여름 이후 국내 영화계에서는 공포물 시나리오가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코미디 영화에 집착했던 국내 영화계가 소재 고갈에 봉착하면서 장르 개척의 일환으로 공포물에 관심을 기울였다.


‘거울 속으로’의 제작사 ‘키플러스 픽쳐스’ 하혜령 기획실장은 “공포 영화 시장은 지금까지 취약했지만 ‘폰’을 통해 상품성이 검증됐다”며 “적은 제작비로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공포 영화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한국 공포영화는 그다지 대접받지 못했다. 1997년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스크림2’ 등 미국 공포 영화의 흥행 이후 한국 영화계에도 이른바 ‘슬래셔 무비’(Slasher Movie·살인마가 등장 인물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영화) 제작 붐이 일었다. 2000년 ‘가위’ ‘하피’ ‘찍히면 죽는다’ 등이 그것이나 이 영화들은 모두 흥행에 참패했다.

# 잔인한 영상보다 음산한 분위기:

'아카시아'

올 여름 국내 공포영화의 제목은 크게 무섭지 않다. ‘아카시아’는 순정적 멜로를, ‘4인용 식탁’은 잔잔한 가족 영화를 연상시킨다. ‘여고괴담’ 시리즈의 세 번째 영화도 ‘여우계단’으로 제목을 바꿨다. 오래전에 개봉됐던 ‘올가미’ ‘손톱’ ‘찍히면 죽는다’ 등 섬뜩한 제목과는 거리가 멀다.

‘장화, 홍련’은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집안 풍경을 연출하기 위해 28억원 중 8억원을 세트제작비에 투입했다. 소품들은 모두 고가의 골동품을 빌리거나 사들인 것이다. 제작사 ‘봄’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잘 정돈된 집이 극도의 공포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들은 ‘슬래셔 무비’와는 다르다. 유혈이 낭자하는 충격적 영상보다 음산한 분위기 연출에 초점을 맞춘다. 한 사람의 과거나 귀신을 볼 수 있는 초능력 때문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4인용 식탁’에도 피가 나오는 장면은 거의 없다.

‘스크림’ 시리즈 등이 국내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한국 관객은 ‘슬래셔 무비’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상명대 영화학과 조희문 교수는 “악마와 천사의 대립구도인 ‘슬래셔 무비’는 ‘선이 악을 징벌한다’는 서구의 기독교적 색채가 깔려 있다”며 “한국의 기본 정서는 ‘한’이며, ‘한을 품은 원혼’을 위로하는 내용의 공포 영화가 더 설득력을 지닌다”고 말했다.

# 왜 가족인가?

이 영화들이 가족의 비극을 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장화, 홍련’은 계모와 어린 자매의 이야기를, ‘4인용 식탁’은 주인공이 어릴 때 겪은 비극적 가족사를, ‘아카시아’는 어린 아이를 입양하면서 가족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뤘다. ‘거울 속으로’의 여주인공은 연쇄살인 사건이 언니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우계단’은 여고생들 간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가족만큼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과 같이 긴밀한 사람일수록 개인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히기 때문에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가족도 그 안에는 엄청난 비극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가족은 개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개인이 성장하면 독립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의 갈등은 비극을 낳기도 한다”고 말했다.

가족이라는 소재는 관객이 실제로 살아가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리얼리티를 살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조희문 교수는 “관객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기가 쉽다”며 “살인마가 100명을 죽이는 것보다 내 가족이 1명을 죽인다는 상상이 더 무섭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