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 세상에 ‘혼자’ 온 후 ‘여럿’과 같이 살다가 다시 ‘혼자’ 저 세상으로 되돌아간다. 독신주의자보다 결혼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혼자’보다 ‘같이’ 사는 것이 더 좋은 모양이다. ‘둘’이 ‘하나’가 되어 사는 결혼 후의 삶이 성공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는 이유가 놀랍게도 서양의 예술음악 변천사에서 찾을수 있다.
▼단선율이 모여 만드는 하모니 ▼
변천사의 시작은 단선율 음악이다. 사람이 ‘혼자’ 이 세상에 태어났듯이 선율 하나가 ‘혼자’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단선율은 혼자 놀고 싶지 않았다. 또 하나의 선율이 기존의 선율과 협동함으로써 두 선율이 같이 살기 시작한다. 기존의 단선율에 선율 하나가 첨가되어 이른바 2성부 음악이 탄생한 것이다. 2성부 모텟은 두 개의 선율이 독립성을 가지면서 ‘따로따로’ 움직이는 특징을 갖는다. 독립성을 가지면서 ‘따로따로’ 놀고 싶은 인간 본성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겐 둘 혹은 여럿이 리듬상으로 ‘같이’ 놀기를 원하는 속성이 또 있다. 그 속성이 반영된 2성부 음악에 컨덕투스라고 불리는 음악이 있었다. 태곳적부터 이미 인간의 속성이 반영된 두 종류의 음악이 생긴 것이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과 음악의 뿌리가 옛날부터 밀착되고 있었다.
2성부 음악이 정식 음악으로 인정된 뒤 13세기에 이르러서는 3성부 음악이 탄생한다. 3성부 음악에도 ‘따로’와 ‘같이’의 원리는 공존한다. 14세기를 거쳐 15세기에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있는 이른바 오늘날의 4성부 음악이 탄생하는데, 거기에도 ‘따로’와 ‘같이’의 원리는 지속된다. 명칭이 바뀌었고, 내부 구조에 질적 변화가 생기긴 했지만, 모텟 스타일의 원리가 반영된 대위법적 수법과 컨덕투스 스타일의 원리가 반영된 화성법적 수법은 공존한다.
가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성악이 음악의 전부였던 시대를 거쳐 음이 가사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절대음악이라는 이름의 기악이 탄생한 후에도 ‘따로’와 ‘같이’의 원리는 음악의 전 영역을 지배한다. 성악과 기악이 공존하는 오늘날까지도 대위법적 수법과 화성법적 수법이 공존하고 있는 것을 보면, ‘혼자 따로 독립해 살고 싶음’과 ‘둘 혹은 여럿이 의존해 살고 싶음’이란 인간의 변하지 않는 속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태곳적부터 인간의 속성을 반영했던 모텟 원리와 컨덕투스 원리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원리는 여전히 지속된다. ‘변하지 않는 것’을 뿌리로 한 ‘변하는 것’의 탄생이란 흥미로운 사실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 나는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정이 음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가정은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을 살리는 곳이어야 한다. 인간의 속성을 거부하는 가정에는 무리가 생긴다. 가정은 구성원 혼자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따로따로 놀아도 되는 곳인 동시에 서로 의존하면서 같이 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가정을 보는 인간의 눈이 어떠하냐에 따라 삶의 성패는 가려진다. 나는 ‘혼자 따로’와 ‘여럿이 같이’가 공존하는, 음악이 주는 교훈을 귀하게 여긴다.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의 ‘구속’과 혼자일 수 있다는 차원에서의 ‘자유’가 동시에 숨쉬는 공간이 가정이어야 한다.
▼공동체의 원리 ‘따로 또 같이’▼
6월은 결혼철인가. 여기저기서 청첩장이 날아온다. 결혼은 삶의 뿌리인 가정, 최소단위의 인간공동체를 낳는다. 이 공동체의 성패가 나라의 성패와 직결된다.
나라의 성패는 교향악의 성패와 닮았다. 단원들이 남 생각은 하지 않고 혼자 자기 악기만 연주한다면 교향악은 죽는다. 자기 악기를 마음대로 불되 여럿이 같이 마음을 합쳐서 불어야 좋은 교향악이 탄생한다. 그러니까 남이 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혼자 노는 것’이 ‘같이 노는 결과’를 초래할 때 아름다운 교향곡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나라가 되려면 사회 구성원이 각각 혼자 놀면서 같이 노는 결과를 탄생시키는 교향악의 생리를 배워야 할 것 같다.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