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희작 ‘월야음매(月夜吟梅)’, 2001년.
《문인화가 조문희씨(54)는 제도권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서울여상을 졸업하고 2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 이후 아파트 안방을 화실삼아 독학한 것이 10여년. 마침내 그가 1985년 동아미술제 문인화 부문에서 ‘난(蘭)’으로 최고상을 받았을 때, 화단(畵壇)은 운필(運筆), 묵취(墨趣), 담채, 화면구성 등에서 남다른 창의성과 생동감을 보여 준 그의 그림에 찬사를 보냈다.》
그 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그는 조금씩 잊혀졌다. 그러다 94년 백악예원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 두 아들을 키우는 주부로 살면서도 열심히 그림을 그려온 한 여성 화가의 집념에 다시 큰 박수를 보냈다. 2년 뒤, 예술의 전당에서 가진 두 번째 개인전은 조씨를 ‘문인화를 전통적 맥락에서 탐구하면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흔치 않은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고졸 출신으로서, 여성으로서, 제도권 밖에서 늘 외롭고 서러웠던 그는 “전시가 끝나고 각 대학에서 받은 출강 요청이 가장 보람있는 ‘사건’이었다”고 말한다.
삶에는 늘 예측 불가능한 복병들이 도사리고 있는 법. 97년 4월, 남편의 뇌출혈은 그녀의 일상과 꿈을 송두리째 빼앗았다. 아침 밥을 먹다 쓰러진 남편은 혼수 상태가 된 지 2주 만에 깨어났고 두 달 만에 퇴원했지만, 중증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그에게 남편은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대기업의 엘리트 사원이었던 남편은 과묵했지만 속이 깊었고 그림하는 사람도 공부를 해야 한다며 신문 스크랩부터 시작해서 독서목록 선정까지 도와 주었다.
화가 조문희씨는 불경, 성경, 유가의 고전에서부터 헤르만 헤세의 소설까지 붓으로 베끼는 사경 작업이 자유로운 필력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허문명기자
그 똑똑했던 남편이, 갑자기, 간단한 의사소통만 할 줄 아는 어린 아이로 변해 버렸을 때, 그가 감당해야 할 충격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어머니까지 중증 치매를 앓기 시작하면서 잠재력을 인정받았던 여성 문인화가로서의 삶도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당시, 몰두한 것이 사경(寫經) 작업. 불경, 성경, 유가(儒家)의 고전, 헤르만 헤세의 소설까지 좋은 글들을 붓으로 베꼈다. 서울 개포동 작은 화실에서 무려 15권의 책으로 묶여진 그의 사경집을 보면 숙연한 마음이 들 정도다. 특이한 것은 초기와 후기 작업의 글씨체가 완연히 다르다.
“미친 듯, 글씨를 쓰다가 어느 순간, 어깨 힘이 좍 빠지면서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글씨체가 나오더라고요. 그전에는 그저 예쁘게 쓰려고만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다시 그림을 생각했어요.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된 거지요.”
매란국죽 사군자 옆에 시를 곁들이는 전통적 문인화에 매달려 있던 그는 그때부터 화폭 앞에서 자유로워졌다. 또한, 삶의 고통 앞에서 자신 역시 비껴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자, 그림은 단순히 여기(餘技)가 아니라 구원의 수단이 되어 버렸다.
4∼13일 서울 견지동 동산방 화랑에서 열리는 세 번째 개인전은 집념을 가진 한 예술가의 혼을 확인하는 자리다. 은은한 먹바탕에 매화 꽃봉오리를 점들로 단순화한 ‘탐매(探梅)’ 시리즈나 감, 조롱박, 석류, 수선화 등을 소재로 그린 ‘고향에 묻어둔 추억’ ‘분노’ ‘추위 버티는 마음’ 등은 작가의 천변만화한 감정의 표현들이다. 번짐의 효과를 보여주는 갈필은 단아한 겉모습과 달리 변화와 도전의욕에 가득찬 그의 격정을 보여준다.
미술평론가 최병식 교수(경희대)는 “조씨의 작품은 공간 구성의 역동성, 긴장감, 과감한 생략 등에서 기존 작업들과는 다른 실험성이 돋보이면서도, 동양화 특유의 여유와 정화(淨化)를 준다”고 평했다.
동산방 화랑 박우홍 사장은 잊혀질 뻔한 화가의 전시를 마련한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문인화 쪽에는 여성으로서 작업에 매진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상황이어서 생활과 그림에서 문인적 삶을 살고 있는 조씨의 진지한 작업태도는 울림이 컸다. 특히 새로운 소재와 구성으로 한국화의 지평을 열어 가고 있는 그의 작품은 절망적 한계상황에서도 이를 극복하는 집념과 어울려 더욱 큰 가능성이 보인다.” 02-733-5877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