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이도경. 박노식
《충무로에 조연 기근이 심각하다. 한 배우가 한해 6∼7편의 영화에 조연으로 나오다 보니 관객들의 식상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 ‘살인의 추억’과 ‘와일드 카드’는 새로운 조연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두 조연들은 이 영화로 곧장 스타덤에 올랐다. 그들은 ‘와일드 카드’의 도상춘으로 나온 이도경(50)과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를 맡은 박노식(32). 이들은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났느냐”는 찬사와 더불어 ‘조연으로 출연해달라’는 숱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와일드카드’ 도상춘役 이도경씨
영화 ‘와일드카드’에서 퇴폐 안마시술소 사장 도상춘으로 나온 연극배우 이도경은 영화 출연 이후 지금까지 18번 인터뷰를 했다. 최근 그에게 들어온 시나리오가 4편, 매니저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6명이다. CF 제의도 들어왔다. 현재 한 방송사에서는 그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쑥스럽게 웃으며) 찍을 사람이 그래 없나.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꼬…. 개봉하고 나서 지금까지 몸무게가 3kg 줄었어요. 인터뷰를 하도 해서 목소리도 쉬었습니다.”
그는 기자시사회에서 영화 속 자신의 연기를 40점으로 채점했지만(아내는 30점이라고 했단다)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도대체 어디서 뭐하던 사람이 이제야 나타났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광택 소재의 원색 양복에 가슴에는 커다란 꽃장식을 달고, ‘오홍홍홍’ 웃으며 경상도 사투리로 방정을 떠는 그는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이라는 평을 들었다.
1974년 연극 ‘데미안’으로 처음 무대에 선 그는 지금까지 42편의 연극에 출연한 베테랑이다. 3년 6개월간 공연한 ‘불 좀 꺼주세요’와 3년 9개월째 상연 중인 ‘용띠 위에 개띠’가 대표작.
“‘연극 해서 돈을 벌자’고 생각했어요. 작품성도 있고 흥행도 되는 연극을 하면 되지요. ‘포르노’ 연극 빼고 순수 정극에만 출연해서 극장까지 산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걸요(그는 2000년 ‘용띠 위에 개띠’가 상연 중인 ‘이랑 씨어터’를 샀다).”
“쪽팔리서” 말을 못했지만 그는 지금까지 몇 개 드라마와 영화에 단역과 조연으로 출연했다. 1992년 영화 ‘애사당 홍도’에서 남사당패로, 같은해 KBS 드라마 ‘사랑마을 사람들’에서는 꽃집 주인으로 나왔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영화나 드라마에 맞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연극의 과장된 연기를 하고 있더라고. 특히 ‘사랑마을…’ 할 땐 내 연기가 너무 창피해 ‘방송국에 불나버려라’ 빈 적도 있어요. 그 뒤론 연극에만 전념했죠.”
그러나 영화에 대한 미련은 강했다. 중2 때부터 그는 영화관 영사기사에게 담배 한 갑씩을 뇌물로 바치며 영사실에서 온갖 영화를 봤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전히 ‘시네마 천국’”이었던 셈이다.
“그때 한국영화에는 남정임 문희 최무룡 등 미남미녀만 나왔어요. 근데 외화를 보니까 못생긴 사람도 영화배우를 하더라고. ‘아, 나도 영화배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러나 그의 본업은 연극으로 ‘용띠 위에 개띠’를 힘 닿는 때까지 하겠다고 한다. ‘용띠 위에 개띠’는 띠동갑 연하의 부인과 살아가는 그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이만희 작가가 쓴 작품.
아내와는 배우와 관객의 관계로 만나 아내의 적극적인 애정공세로 결혼에 성공했다. 그는 “왜 나이도 많고 가난한 연극배우에게 시집을 오려고 하나. 저 집안에 무슨 하자있는 거 아닌가 싶어 뒷조사도 해봤다”며 크게 웃었다.
나이 50에 뛰어든 영화판은 분명 연극과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가 ‘용띠 위에 개띠’를 3년 9개월간 공연해 동원한 관객은 15만명. ‘와일드 카드’는 개봉 첫 주말 3일 만에 전국 30만명을 넘겼다.
“늦은 결혼으로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일흔까지 돈 벌어야 돼요. 그러니까 영화를 계속해서 돈 많이 벌어야죠(웃음). 저는 ‘×랄맞은 역’만 하고 싶어요. 뭔가 ‘골때리는’ 거. 밋밋한 건 재미없잖아요. 오홍홍홍.”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살인의 추억’ 백광호役 박노식씨
요즘 여고생들 사이에서 ‘백광호 놀이’가 유행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바보 백광호의 말투를 흉내내는 것으로 수업 중에 선생님이 문제를 내면 학생들은 “나야 잘 모르지∼”라고 답한다고 한다.
백광호 역을 맡은 연극배우 박노식은 최근 갑작스러운 인기에 얼떨떨하다. 불과 1개월 전만 해도 대학로에서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그였다.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그에게도 회원 3000여명의 인터넷 팬카페가 생겼다.
“제가 완전 ‘컴맹’인데 요즘 열심히 타자 연습 중이에요.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져 무척 당황스러운데 이젠 좀 즐기려고요. 하하.”
32년 동안의 인생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척 다이내믹”했다. 전남 강진이 고향인 그는 고교 졸업 직후인 1990년 무작정 상경해 경기 부천시 프레스공장에 취직했다. 연극을 시작한 것은 사시(斜視) 교정 수술을 받은 1993년. 극단 ‘물뫼’에서 연기를 시작해 ‘늙은 도둑 이야기’ ‘안 내놔 못내놔’ ‘굿 닥터’ 등 15편의 연극을 했다.
그러나 연극배우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어 다양한 부업을 했다. 자전거 수리공, 김치공장 직원, 노점상, 동대문시장 야식 배달부, 나이트클럽 웨이터(그는 ‘깜찍이’로 불렸다고 한다) 등 닥치는 대로 돈되는 일을 했다. 단란 주점에서도 일해보고 싶었지만 못생긴 얼굴 때문에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누명을 쓰고 경찰에게 모질게 고문당한 극 중 백광호처럼 그는 호감가지 않는 얼굴 때문에 불심검문을 피해간 적이 없다고 한다. 경찰은 현금지급기 앞에서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난감해하던 그를 도둑으로 오해해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데려가기도 했다.
“너무 화가 났지만 결국 이렇게 생긴 얼굴 때문에 백광호 역에 캐스팅됐으니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죠.”
영화 개봉 이후 “실제 바보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영화 속 연기가 너무 ‘리얼’해서다. 촬영장에서도 구경나온 주민은 물론 심지어 함께 일하는 엑스트라들도 그를 바보로 알았다고 한다.
“엑스트라들이 내가 촬영 현장에서 즉석 캐스팅된 실제 그 동네 바보인 줄 알았나봐요. 안쓰러운 표정으로 ‘화상은 어쩌다 입었느냐’고 묻더라고요. 분장인데…. 나도 장난기가 발동해서 덜떨어진 표정으로 ‘아푸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건 ‘쯧쯧쯧….’”
그는 6월 23일부터 연장공연에 들어가는 연극 ‘날 보러와요’에 새롭게 투입된다. ‘날 보러와요’는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 된 연극. 그는 용의자의 친구 역을 맡았다. 영화를 먼저 본 사람들은 다소 헷갈릴 수도 있을 듯.
그는 작고한 배우 박노식과 이름이 같다. 그는 “악역으로 유명했던 박노식씨처럼 인상적인 악역을 맡고 싶다”며 “보기엔 이래도 운동을 좋아해서 킥복싱, 합기도 등 꽤 많은 무술을 배울 만큼 와일드한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사랑을 고백하려던 여자에게 다른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14일 대학로 한 횟집에서 팬미팅을 준비하며 마음을 달래고 있다.
“한 사람의 사랑을 얻진 못했지만 많은 분들의 사랑을 얻었으니 됐죠, 뭐. 팬카페 회원 대부분이 여자거든요.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에요.”(웃음)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