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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발가벗는 코리아-작품 위한 ‘이브의 중노동’

입력 | 2003-06-05 14:36:00


◇ ‘직업 누드모델’ 500여명 활동 … 힘든 정지 동작 직업병 시달리며 치열한 경쟁

”하늘이 노래지고 별이 반짝거렸어요. 머릿속엔 부끄럽다는 생각만 가득했지요.”

한국누드모델협회 하영은 회장(35)은 1988년 처음 500여명의 사진동호회 회원들 앞에서 옷을 벗었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기억했다. 아르바이트로 힘들게 생계를 유지하던 당시 강도한테 월급을 통째로 빼앗긴 게 옷을 벗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하씨는 당시 월급의 절반쯤 되는 돈을 받고 누드모델을 했지만 부끄러움으로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었다고 했다.

그러나 베테랑 누드모델이 된 지금은 그 반대의 경험을 하고 있다. 보통사람들이 남 앞에서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는다면 그는 옷을 벗어버리고 나서 더 당당해진다. 순수한 직업모델이기 때문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누드모델의 세계에도 나름의 질서와 법칙이 있다는 뜻이다. 사진이나 미술 작품을 위해 옷을 벗는 ‘예술적’ 누드모델들은 한결같이 이런 금언을 내세운다. ‘성을 상품화하는 일에는 응하지 않는다.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순수한’ 누드모델들은 자신들의 일이 외설보다는 예술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 자기 단련 성실성 요구 … 수익은 천차만별

누드모델들은 작가의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누드모델 하영은씨(왼쪽)와 김은미씨가 모델로 나선 누드 작품.

예술과 외설은 비록 그 변별 기준이 분명하지 않고 주관적이긴 하지만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느냐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수용자의 몫이다. 이필훈 한국광고사진가협회 부이사장(51)은 “작품을 봤을 때 성적 호기심을 먼저 떠올리게 되면 외설에 가깝고, 아름다움이 먼저 다가오면 예술에 가깝다”고 말했다.

요즘 누드문화가 보편화돼가는 추세지만 아직도 누드모델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흔히 사람들은 누드모델을 성적인 것과 연관시켜 접근하거나 비하하려 한다. 인터넷 성인방송이나 포르노사이트에서 성인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옷을 벗는 이들이 많고, 누드예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도 낮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훌륭한 누드모델로 성장하려면 절제와 꾸준한 자기 단련, 그리고 성실성이 필요하다. 누드모델의 세계도 보통의 직업 세계와 비슷하다. 모델들은 직업병에 시달리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수익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하다.

허리 통증, 무릎 관절염, 발목 저림, 근육 경련과 파열, 탈골, 담…. 이런 증상은 누드모델이 아름다움을 표현한 대가다. 장시간 앉아 있어야 하고, 한쪽 다리를 들거나 팔을 치켜드는 동작을 오래 지속하다 보면 어느새 몸은 고통으로 오그라든다. 하씨는 “온몸에 부황 자국, 침 자국이 있고 뼈도 교정받았다”면서 “모델 일은 ‘노가다’보다 더 힘들다”고 말했다.

사진작가나 화가들은 무엇보다 균형 잡힌 몸매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모델들은 꾸준히 몸을 관리하며 더 좋은 표현력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씨는 평소 재즈댄스 한국무용 살사 탭댄스 등을 계속해왔고, 이제는 특공무술까지 익힐 생각이다. 주로 누드 크로키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김은미씨(27)는 키 154cm에 40kg의 가냘픈 체격이지만 수영이나 피트니스를 통해 몸매를 가꾸어 화가들로부터 좋은 몸매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씨는 “하루 2~3시간만 일해도 근육이 뭉치거나 경련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며 “평소에 체력관리를 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모델 일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누드모델을 해본 이들은 전국적으로 수천, 수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일회성에 그친다. 자신의 몸매도 드러내고 큰돈도 벌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누드모델을 지원하지만 생각과 달리 모델 일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바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 균형 있는 몸 기본 …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5월30일 예비 사진작가들이 동아문화센터에서 누드를 촬영하고 있다.

현재 1년 이상 장기간 활동하는 직업모델들은 400~500여명. 미술·사진·광고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누드모델협회 소속 회원이 200여명, 활동 영역을 주로 미술 쪽에 국한하고 있는 한국미술모델협회 소속 회원이 30여명, 나머지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이들이다. 아직까지는 비교적 수요가 많은 편이지만 꾸준히 몸관리를 하지 않을 경우 도태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모델들은 스튜어디스, 간호사 등 전문직 출신에서부터 주부, 대학생, 심지어 50대 중년 여성까지 다양하다. 특별한 자격조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씨는 협회에 찾아오는 모델 지망생들의 사람 됨됨이와 책임감을 가장 먼저 본 뒤 외모를 살핀다고 했다. 몸에 흉터가 적고, 뼈대가 곧거나 상하체가 균형을 이루면 신체조건은 합격이다.

누드모델 가운데 모델 활동만으로 많은 돈을 버는 이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미술 쪽 모델료는 수년 동안 시간당 3만5000원 안팎에 그치고 있어 일주일에 20시간 이상 뛰어야 일반 직장인의 수익과 맞먹는다. 사진모델의 경우 얼굴이 나오는 등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시간당 단가가 훨씬 높지만 모델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 시간과 상황에 따라 금액도 천차만별이어서 평균 수익을 따지기는 어렵다. 모델 경력 5년째인 김씨의 경우 주로 대학이나 문화센터에서 활동하는데 학기중에는 400만원 정도, 방학중에는 150만~200만원 선을 벌고 있다. 16년째인 하씨는 특급 대우를 받고 있지만 자신의 수익은 예외적이라며 모델 일로 일확천금을 꿈꾸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모델을 직업으로 택하기에는 사실 위험부담이 크다. 고정된 수익도 보장받기 어렵지만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퇴직금도 없다. 작가들과는 철저하게 주종관계여서 인간적 모멸감을 느낄 때도 많고, 점잖은 예술가들이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모델들은 자신들이 작가들의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당사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예술가에 의해 훌륭한 작품으로 승화된 자신의 몸매를 보며 엄청난 감흥(나르시시즘)을 느낀다.

“제 몸을 표현한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몰라요.”

하씨는 최근 어느 화가에게서 자신의 누드 그림이 담긴 작품을 한 점 샀다. 화가의 땀과 정성으로 육체의 곡선이 아름답게 표현된 작품을 보면서 하씨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으로 뿌듯해졌다고 했다.

한국교원대 미술교육과를 나온 김씨는 누드 크로키를 그리다가 누드모델이 된 경우. 대학시절 우연한 기회에 무보수로 누드사진 모델을 했는데 당시 작가들이 “키는 작지만 누드잡지 모델보다 몸매가 예쁘다”며 모델활동을 권해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은 학교 후배들과 스승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옷을 벗고 있다. “원래 춤이나 운동 등 몸으로 에너지를 표현하는 것을 좋아해 모델 일이 적성에 맞는다”는 김씨는 “인체의 예술성을 표현하는 모델의 순수한 매력은 그 어느 것보다 위”라며 건강한 웃음을 지었다. 외국의 한 잡지에서 할머니 누드모델이 사진작가들과 할아버지, 손자들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는 김씨는 “경제적인 수단으로는 오래 하고 싶지 않지만 그 할머니처럼 오래오래 모델로 남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정현상 주간동아 기자 doppel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