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총선연대의 서울역앞 집회. 정철희 교수는 비판사회이론, 자원동원이론 등을 동원해 한국 시민사회의 동학을 분석하며 ‘동아시아 신좌파론’을 구상하고 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한국 시민사회의 궤적:1970년대 이후 시민사회의 동학/정철희 지음/276쪽 1만7000원 아르케
빠르고 가벼운 것이 미덕인 시대에 진지한 연구서 한 권을 받아드는 것은 그 의미가 갑절이나 크다. 약 1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사회운동 연구의 영역은 불모지로 보였다. 1990년대 중반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분석한 저자(전북대 교수·사회학)의 박사학위 논문을 받아들고 전에 없던 흥분을 느낀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그토록 폭발적인 사회운동의 시대를 겪으면서도 학술 분석이 거의 없는 실정에 대해 ‘현실의 풍요와 이론의 빈곤’을 개탄하던 터라, 정교한 운동 분석을 시도한 정 교수의 논문은 특별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정 교수의 논문은 국내에서 ‘분석적’ 사회운동 연구의 시대를 개막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은 ‘시민사회와 동원에 관한 이론적 탐색’, ‘한국의 민주화운동’, ‘민주주의의 심화’ 등 크게 세 부문으로 나누어져 비교적 짜임새 있게 구성됐다. 우선 제1부의 ‘…이론적 탐색’에서는 하버마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을 권유하고 포스트마르크시즘의 복잡한 지형을 보여주다가, 어느덧 저자의 시야는 비판사회 이론의 큰 흐름을 아우르며 사회운동론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제2부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분석에서는 미시동원(저항을 위한 기초적 자원 및 조직을 공급하는 것)과 중위동원(사회운동조직이 중심적 그룹에 의해 연합된 운동세력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자원동원 이론의 세련된 개념을 제시하고, 여기에 의미틀(frame) 분석이라는 구성주의 이론을 접목시켜 민주화 운동을 그 기원에서 6월 항쟁까지 깔끔하게 분석했다. 제3부 ‘민주주의의 심화’에서는 정치참여와 가치변동, 전통문화 등 한국 시민사회의 정치문화적 요소들을 민주주의와 관련해 분석함으로써 저자의 확장된 관심영역을 잘 드러냈다.
개별 논문들이 비록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어 다채롭긴 하지만 책의 전체 흐름에는 저자의 학문적 정서를 반영하는 일관성이 두드러진다. 논쟁의 바다를 느긋이 유영(遊泳)하다가 때로 격정적 사회운동의 세계로 몰입해 가고, 다시 우리 사회의 일상으로 탈출하여 가치와 문화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바로 그곳에 거친 호흡과 뜨거운 가슴이 차갑고 세련된 이론들로 잘 버무려진 성찬이 차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전하는 가장 강렬한 메시지는 서론에서 밝히는 ‘동아시아 신좌파론’의 구상에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서구 모델의 보편주의와 비서구의 특수주의를 모두 넘어서며 분단과 민족화해와 같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반영하는 새로운 시각이다.
또 그것은 곧 바로 동아시아의 지역연대라는 실천적 의제로도 확장된다.
아쉬운 것은 ‘동아시아 신좌파론’의 구성이 복잡하듯이 그 범주와 이념적 구획이 여전히 혼미하다는 점이다. 아울러 이 책에서 다루는 각각의 주제들은 체계적인 동아시아 신좌파론에 기반하기보다는 그런 구상을 위한 모색이자 문제 제기의 성격이 짙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저자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것이면서 후속의 연구를 기대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dycho@korea.ac.kr